- ‘호러 사피엔스’를 읽고
도다야마 가즈히사 지음/ 이소담 옮김/ 단x추/2021년
책의 부제가 ,‘공포 영화로 인간을 읽다‘였는데 참 만만치 않았다.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평이 좋거나 인기가 많아도 시간을 들여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채널에서 보는 걸로 족하다.
그런데도 부제가 ‘공포 영화로 인간을 읽다’가 붙은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독서 모임에서 읽기로 정해진 책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을 시간이 없으면 내가 맡은 발제 부분만 읽어도 되기에 요즘은 도서관 대출을 이용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웬만하면 책은 사서 읽자 싶던 때라 용감하게 사놓고 책장에 꽂아둔 경우이다. (맞다, 내게는 책장에 이런 책들이 아직 남아 있다.)
어쨌거나, 제목이나 부제에 ‘호러’, ‘공포’ 이런 말들을 달아놨으니 책에는 공포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 나올 거 같지만 노!노!
부제의 서술부는 ‘인간을 읽다’, 문장의 핵심은 서술어 아니겠는가.
느낌, 정서라는 부분에 대한 심리학과 사회, 뇌신경학 입자에서 주장하고 증명하고 설명한 내용을 소개하는 게 주가 되겠다.
물론 스스로 공포물 마니아라 밝힌 글쓴이는 틈만 나면 공포물을 예로 들어 제목값을 했지만, 읽을수록 공포는 마케팅을 거들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쓴이는 서문에서 공포는 철학의 주제가 되지 못한다고 서운해(?)한다. 하지만 공포는 ‘몇 가지 점에서 꽤 흥미로운 철학적 주제’라고 주장한다. 철학은 전통적으로 정서를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추론을 방해하는 요소로 취급해 왔다며, 과연 정서가 이성과 합리의 적인지 의문을 던진다. 정서도 우리의 행동에 합리성을 가져다주는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진 글쓴이는 ‘무서운 느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정글에서 맹수와 마주쳤을 때, 무섭다는 느낌이 도망이라는 합리적 판단을 내리게 해주지 않겠느냐며......
공포에는 무서운 느낌이 동반되고, 그 무서운 느낌을 오락으로 즐기는 것이 호러물이며, 사람들은 픽션,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호러물을 보며 공포심을 느낀다.
그렇다면 공포란 무엇일까? 공포에 수반되는 무서운 ‘느낌’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양한 대상들을, 허구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서워하는 것일까? 이 세 가지를 탐구하는 것으로 책은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흥미로웠다. 공포를 구성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무서우면 그만이지 그 무서움을 무엇으로 구성하는지 따져보기도 한다는 게 신기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대상 ‘인지’-공포감이나 무서움의 ‘느낌’(어라? 무서워!라는 감각)-위해를 줄이려는 ‘행동’(‘꺄!’라는 행동) 이렇게 세 가지가 공포의 요소이며, 이 책에서 공포의 원형을 ‘어라 무서워 꺄’체험이라고 칭한다. 무서우면 오히려 소리를 지르지 않거나 아주 낮은 소리로 ‘어’ 짧은 소리만 내는 나로서는 저 ‘꺄’반응이 너무 호들갑스러게 느껴지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공포의 본질(?)을 찾아 인지적 측면, 신체적 측면, 동기 부여적 측면에서 공포에 대한 고찰이 이어졌다. 공포는 정서적 반응 중 하나이므로 공포를 알기 위해서는 정서이 본질을 알아야하고, 정서를 무엇과 동일시해서 어떻게 모델화해야 인지가 먼저인지, 정서가 먼저인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인문학적 연구와 이론, 그에 대한 반박과 옹호 등이 이어졌다.
네덜란드 학자 다마지오의 ‘정서의 합리성’이론을 바탕으로 정서가 합리적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소마틱 마커 가설에 안착하나 싶더니 정서는 신체적 반응의 표상이라는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표상이란 무엇인가’라는 동굴 속으로 잡혀 들어갔다. 이쯤되니 공포에 진심인 이 글쓴이의 희열이 진짜 공포로 다가왔다.
어쨌거나 호러는 공포의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둘러싼 이야기라는, 장르적 설명도 양념처럼 뿌려주니까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뭐가? 정신이.
표상은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나타내다’와 ‘본래의 기능’이 갖는 학문적 용어의 설명을 들어야하고..... 인지와 감각과 느낌과 정서와 신체 반응의 연관성 등을 통해 호러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뇌신경과학까지 간다. 그런데 이러면 ‘호러’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와 정서와 신체반응의 상관 관계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거 같은데요, 교수님! 하고 외치게 된다. 물론 내면의 소리다.
그래도 무척이나 친절하신 분인지 300쪽이 넘는 학문적 설명들을 마지막에 세 문단으로 요약해주시기도 한다.
공포는 표상이다.
사람도 원래 푸시미풀유 표상을 사용해서 ‘어라 무서워 꺄’를 하는 생물이었으며 진화 과정에서 다양한 표상을 만드는 능력이 추가되었으나 공포에 관해서는 아직 ‘어라 무서워 꺄’ 시스템을 사용한다.
호러를 볼 때 느끼는 것은 진정한 공포다.
호러를 즐기는 이유는 무서움 그 자체가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공포의 무서운 ‘느낌’은 공포의 중간 수준의 표상이 워킹 메모리로 보내질 때 생긴다.(아마도?)
의식의 특질은 ‘느낌’을 유물론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는 생각은 틀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번 더 강조한다. 인간은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한 ‘어라 무서워 꺄’라는 원시적 시스템을 지금까지도 사용하면서 공포를 즐기는, 생물학적 역행까지 가능한 재미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독특함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단순한 정보처리 기계인 박테리아롭터 시자해서 표상 능력을 서서히 획득하는 과정을 통해 현재와 같은 기이한 존재로 진화하게 된 과정을 필수적으로 돌아보아야 한다고 짱한다. 그리고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생물학, 뇌 과학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고...
이 책을 읽고, 저자가 애쓴 만큼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글쎄...

인간은 원래 모순적이며 진화가 ‘발전’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므로 공포를 즐기는 것이 생물학적 역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충분히 설명했는데 내가 놓친 걸까...
인간이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한 뇌과학자의 강연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인간이 공포를 즐길 수 있는 것 역시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공포를 ‘즐거워 할’ 수 있는 것도 내게 닥친 현실이 아니라 시뮬레이션과 비슷하게 머릿속에 일어나는 상상에(여기까지는 책에서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감정이입(이 부분을 왜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 이렇게 복잡하고 다단한 시스템을 거쳐 단순한 동작 하나를 하는 것이 인간이라니! 그렇다면 깻잎 논쟁 역시 이제 종결될 때가 되었구나 싶기도 했다. 내 가족과 친구, 연인의 깻잎이 아니라면 절대! 떼어주면 안 되는구나. 그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나온 행동을 의미없이 쓰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또, 단순 오락으로 즐길 수 있는 ‘호러’를 통해, 이렇게 인문학적 통찰을 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구나.
참! 인간의 호기심과 지적 능력이란!!!
그래도 글쓴이가 너무 신나하며 글을 쓰는 게 느껴져서 멱살잡혀 연구의 동굴에 딸려들어간 느낌이 무서우면서도 재미있었으니, 이 책은 호러 인문학이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