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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요, 헤세 씨

-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by 준 원 규 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 유명한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들을 이제야 다 읽었는데, 지금도 읽으면서 좀 힘들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처럼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긴 것도 아니고, 사건이 복잡하거나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헤세의 이 두 소설에는 심리를 설명하는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서술이 많이 나오는데, 그럼 나는 관념적인 내용을 싫어하는가. 그럴 리가. 현학취가 있던 나는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서술들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런데도 헤세의 소설들이 싫었다.


몇 번의 도전 끝에 <데미안> 읽기에 실패하고, 헤세의 수필집을 읽어 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가끔 수필을 통해 작가의 색채가 어떤지를 알고 나면 시나 소설이 쉽게 읽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웬걸. 수필마저 읽히지가 않았다. 뭐지?

이번에 <수레바퀴 아래서>까지 읽으면서 깨달았는데, 나는 헤세의 문체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듯, 문장의 내용 자체는 무척 좋은데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해? 하면서 툴툴거리다 보면 책장을 덮고 싶어졌다.

하지만, 츤데레 친구의 말을 들어준다 생각하고 읽다 보니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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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먼저 읽고,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는데, <수레바퀴 아래서>는 <데미안>을 쓰기 위한 초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청소년이라면 <수레바퀴 아래서>에 더 많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었다. 또, 최고의 학벌을 가졌지만 윤리의식이나 직업의식의 미천한 수준을 보여준 우리나라의 몇몇 지도층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독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는 한스. 아버지의 기대는 물론 학교의 교장선생님부터 목사님까지 모두 한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다른 친구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한스는 수험생 전체 2등으로 입학하게 되었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온다.

동네에서 처음으로 태어났던 특별한 천재 한스는 더 이상 없고, 실패해서 자신이 무시하던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러나 마을 대부분의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평범한 삶을 부끄러워하는 한스를 보면서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라고 성장에 대해 이야기했던 <데미안>처럼, 한스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아이들 틈에서 자기의 위치를 재정비해야 했다. 각 지역에서 모인 여러 계급의 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워야 했고, 자기 안의 욕망이 진정 자신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욕망도, 두려움도, 자랑스러움도 모두 타인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껍질을 깨고 버려야 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채워진 한스의 자존감은 한없이 나약했고, 결국 자기만의 견고한 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끝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 아래에서 질식해 버린 것 같았다.

성적이 좋은 아들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면서, 자신의 욕심에 차지 않는 아들에게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한스의 아버지도, 자신의 훈장 같은 학생이 되어줄 한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더 이상 빛날 게 없는 한스에게는 차가운 선생님들도 진정한 어른이 아니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길을 따르라던 플라이크 아저씨를 한스가 좀 더 친밀하게 여겼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한스 본인이 가진 예민한 기질도 문제였겠지만 휴식을 즐기는 법을 알고, 자신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자신에게 주어진 그 공부와 과제들이 정말 자신이 알기를 원해서, 잘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고민해 볼 시간도 없이 여러 사람들의 욕망을 짊어진 채 헉헉거리는 한스의 모습은 참 안타까웠다.

입시라는 무게에 청소년들이 힘겨워하고, 입시라는 거대한 무게 추에 모든 교육의 목표가 맞추어진 우리 사회가 어떤 어른을 키워내고 있는지 생각해 볼 때, 한스의 실패에 대해 많은 학생들이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데미안>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던져지는 지식들에 대해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비판해 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IMG_2494.JPG 가끔은 풀도 의자에 앉아 쉬는데 말이다......

성장은 청소년의 것만이 아니니 나 역시 지금 나를 감싸고 있는 ‘알’은 무엇인지, 내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 깨뜨려야 하는 ‘알’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말 그 욕망을 내 것이 맞는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몫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 준 좋은 책의 저자,

마음에 안 드는 말투를 가졌지만, 헤세 씨! 반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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