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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윈도 근사한 편집샵 같은...

- 소설 <인간의 척도>를 읽고

by 준 원 규 수

마로코말발디 저/그린하우스/2020년



르네상스... 발음부터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인문학이 발전하고 예술은 농익어 가고, 귀족과 낭만이 숨 쉬고 있을 것만 같은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많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오는 시공간인 것 같다.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는.


책장에서 발견된 이 책을 인문학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으려고 보니 소설책이었다.

아마, 무료배송을 목표로 예스24 중고 코너에서 이 책 저 책 담다

오, 재미있겠다, 하면서 산 것 같은데 진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면 인물 관계도가 나오고, 그 뒤에는 인물 소개가 4,5페이지에 걸쳐 나오는데

그 모두가 주요 인물인 줄 알고 다시 덮을 뻔했다.

다른 연재글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나는 기억력이 별로고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완역본을 사놓고 못 읽는 이유는 인물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인데

내가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으려나.... 이 책은 한 권이니 괜찮으려나...

걱정을 안고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지금!!!!!

추리 소설이 이렇게 긴장감 없고 재미없을 수 있구나!!!!

sticker sticker


주요 사건은 두 가지이다.

살인 사건과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위한 프랑스 대사들의 스파이 작전.

아직 신앙에 대한 입김이 곳곳에 거세게 남은 밀라노에서 섭정 '일 모로'의 신임을 받는 왕궁점술사는 신의 분노를 이야기하지만 레오나르도(맞아, 그분.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살인 사건임을 주장한다.

이게 이야기의 중심이어야 할 것 같은데

이야기는 아주 많이 확산되어 버린다.

나보다 잘 나가는 도시 국가들을 밀어버리고 싶어 프랑스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와

밀라노의 '일 모로'의 총애를 받으며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레오나르도가 새로운 무기를 만들까 걱정하는 프랑스의 귀족들.

그리고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돈에 대해서 작가는 많은 사람들의 입을 빌려와 토론을 시키고

그 사이사이 현대적 비유를 빌어가며 역사적 설명을 붙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인데,

- 김 선비의 나막신에도 물이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운동화 앞 코와 옆에서부터 물이 들어오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뭐 이렇다.

그러다 보니 작가의 설명이 들어갈 때마다 이 소설이 중세가 배경인지 현대가 배경인지 몰입이 깨졌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는 레오나르도도 살인 사건을 해결하자는 건지

일 모로가 주문한 청동상 제작을 위해 다니는 건지 헷갈렸다.

말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고, 중간중간 자신의 지식도 뽐내야 하고, 위트 있다는 칭찬도 받고 싶어 하는 욕심 많은 저자의 모습이 보였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이었던 걸까.


살인 사건 해결이라는 추리 형식을 통해 긴장감을 올리며 많은 이야기들을 끌어가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냥 하나에만 치중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살인 사건을 중심에 놓고도 인간의 이기심이나 상처, 모순 등을 잘 그려내는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니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수도원과 성직자들의 권력욕과 모순을 그렸고,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도 살인 사건을 계기로 마녀사냥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성직자의 모순을 그리며 건축에 대한 이야기로 근대로 넘어가는 민중들의 힘을 그려냈다.

그에 비해 넓게 펼쳐진 이 소설은 깊은 주제의식에 비해 그려내는 이야기들의 밀도가 떨어져

화려한 쇼윈도에 비해 내부는 부실한 명품 편집샵 같았다.



혹은 더 좋은 건 그들이 행동하게 만드는 거다. 필요한 거라고는 여기서 한마디, 저기서 고갯짓, 적절한 때에 침묵을 지키는 것뿐이다. 일종의 사회적 윤활유, 그게 지아코모 트로티가 생각하는 자신의 역할이었다.
-중략-
돈 역시 지아코모 트로티에게는 언제나 윤활제였다. 거래를 더욱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편리한 해결책. 나에게 10의 가치가 있는 게 있고 당신에게 6의 가치가 있으니 나에게 4를 주면 거래는 성립된다. 그게 돈이 작동하는 원리다. 그게 트로티가 항상 돈을 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돈이 다 떨어지면 구조도 무너진다.
"돈은 꺼려야 하지만, 밀라노의 진정한 주인은 돈이 아니에요. 돈은 힘을 얻는 도구로 쓰이지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여겨지는 건 아니죠. 조카딸의 지참금을 사용해서 공작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일 모로부터 전임자에게 그 자리를 사서 가진 도시의 가장 급 낮은 서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숭배하는 끔찍한 것은 돈이 아니라 힘이죠."
- 중략-
"하지만 이 힘은 수명이 짧고 유한해요.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진정한 힘을 갖고 계십니다. 인간은,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어떤 지위에 있든 하느님을 조롱하고 자신이 갖지 못한 권리를, 오로지 신에게만 속한 권리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결국 살인 사건의 원인은 이 돈 때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고

전쟁에도, 도시 국가로서의 권력을 형성하는 기반에도, 문화를 꽃피우는 데에도 돈(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소설의 내용을 돈과 실수하는 인간으로 압축해서 밀도를 높이는 게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자신의 실수를 해결한다는 면에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작고 무력하게 태어났고, 두 살 짜리 아이는 같은 나이의 개나 말, 심지어는 코끼리보다도 약하고 훨씬 미완성인 생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세상의 모든 동물을 추월하고 지배하게 되고, 그래서 태생이 아니라 자라고 배우는 것을 우리가 인간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과 다른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믿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예상하는 것을 비교해보지 않으면 사람의 지성과 판단력이 건전하게 자나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실수에서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 그 자체를 척도로 삼아 자신을 비교하는 것뿐입니다. 사람과 달리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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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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