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화가 났다. 아니, 분노했다.
머리를 터뜨릴 듯 쉬지 않고 올라오는 분노가 다스려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하면 분노는 금세 목소리를 높였다.
지가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이라 하지 않았어?
나는 시간에 늦을까 봐 밥도 안 먹고 부랴부랴 왔는데 뭐?
아직 안 끝나?
내가 데려다줄 거라고 생각해서 이런 데에 예매해놓고, 뭐? 안 데려다줘도 됐어?
하루 종일 내 일정을 망쳐놓고 미안해하지도 않고
내가 왜 이 휴일에 쉬지도 못하고 저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화를 참느라 말 한마디 없는 그에게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녀가 공연 중 있었던 우스개 하나를 들려 주었다.
- 그딴 소리 들으려고 여기까지 왔냐?
터지기만 기다리던 분노는 말을 타고 튀어나왔다.
- 내가 오늘 너 때문에 아주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어. 남 불편할까봐 내가 뭔가를 희생할 필요가 없어.
튀어 나오기 시작한 화를 주체하려니 운전이 거칠어졌다.
자신이 거칠게 운전을 할수록 허리가 불편한 그녀가 느낄 통증은 생각나지 않았다.
저 좋자고 내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그런 데에 예매해 놓고 내가 왜 화를 참아야하지?
저나 그런 공연이 좋지 나는 좋을 거 하나도 없는데
저 때문에 안 봐도 될 영화 보면서 끝나기까지 기다려줬더니 미안한 기색도 없이.
내가 지 운전기사야? 뭐가 저렇게 당당해?
“휴일이고 차 막힐지도 모르잖아. 그냥 전철타고 갈게. 교통편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뭐.”
웃기고 있어. 내가 진짜 그러라고 했으면 서운하다느니 어쩌느니 난리를 쳤을 거면서.
내가 그 속을 모를 줄 알아?
“왜 미안해야 해? 고맙기는 하지, 데려다 준다는데. 근데 나는 진짜 전철 타고 가도 돼. 그럼 끝나고 오는 건 혼자 할게. 기다리려면 힘들잖아. 괜찮아, 그냥 가.”
아침을 먹으며 나눴던 대화가 생각나니 다시 열이 뻗쳤다.
말만 그렇게 해 놓고, 결국 내가 이럴 줄 아니까 배짱 부린 거지, 내가 알고도 속은 거지.
이렇게 저 때문에 내 하루를 희생했는데 공연 끝나는 시간도 제대로 말 안 해주고,
공연 끝나면 빨리 빨리 나와서 만나기로 한 데에서 기다려야지.
그리고 공연이 늦게 끝나면 늦게 끝난다고 연락을 해줬어야지.
미친 거 아냐?
뭐 잘 한 게 있다고.
휴일인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내가 왜 저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해?
화에 갇혀버린 그가 속도를 줄이지 않아 경사진 길에서 범퍼 쪽이 긁혔다.
정말 재수가 없다싶어 짜증 역시 솟구쳤다.
감당할 수 없는 화가 자신을 자꾸 덮치고 있음에도 그는 분노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그녀에게 먼저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
너무도 지친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차에서 내려 멀어지는 그의 차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공연을 봤다.
여러 생각들이 불쑥 불쑥 들만큼 감성 자극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공연 내용에 대해 하나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들도 떠올릴 수 없었다.
몇 달 전부터 기대에 차 예매해 놓고 기다린 공연이었는데 자신이 죽을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몸둘 바를 모르겠는 중압감에 공연 중 느낀 충만감이나 즐거움은 박살이 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자기만의 분노에 갇힌 그를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지치는 기분이었다.
참, 불쌍한 사람이지 않은가.
저렇게 분노에 사로잡힐 만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는 그 부당한 책임감이.
아무도 얹어 주지 않은 책임감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홀로 분노하는 그가,
고마운 일을 해 주고도 미안하다는 말이 들어야 하는 그가 참 부담스럽게 가여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