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를 그려보다
세 번째 사고 여행의 목적지는 아르헨티나.
가고 싶었던 곳은 아니지만 그 먼 남미까지 갔으니 그 남미의 끝 아르헨티나를 보기로 한다.
아르헨티나라고 하면 아는 것은 축구 선수 마라도나와 ‘돈 크라이 포미 아르헨티나~’하는 노래의 주인공 에바 페론 정도.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길쭉한 지형 때문에 북부는 아열대, 중부는 온대, 남부는 한대 기후를 보인다는, 세계 면적 8위의 나라.
파타고니아의 시작점이라는 엘 칼라파테를 거쳐, 트레킹 여행의 천국이라는 옐 찰텐, 그리고 남단 끝의 마을 우수아이아를 향해 가 보자.
엘 칼라파테에 가면 가장 유명한 그분,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만나러 가야 한다.
살아있는 빙하라는 이곳은 그 위를 직접 겪는 트레킹으로, 혹은 보트를 타고 그 부근 가까이 가는 방법으로도 경험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냉대기후에 속한다는 이곳의 겨울에 해당하는 7월에 오니 눅눅하기 그지없다. 거기에 바람은 엄청 쌀쌀맞아서 자꾸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나는 전망대에서 저 거대한 빙하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깨끗한 순백의 눈으로만 이루어졌을 거라 상상했던 빙하에는 흙 자국이 있었고, 한 번씩 무너져내리는 빙하의 소리는 비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내가 컨디션이 좋았다면 떨어져 나온 빙하들이 자유를 찾았다고 쾌재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을까.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자연의 모습에 오히려 어떤 감탄도 나오지 않는 걸지도......
다음은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엘 찰텐으로 가보자.
평평하고 둥글둥글한 우리나라의 지형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에 한번 더 설렌다.
저 뾰족뾰족한 피츠로이 산으로 트레킹을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전히 컨디션이 저조한 나는 그 부근 호수 주변만 돌아보기로 한다. 컨디션이 떨어지니 무얼 봐도 좀 멍하다. 아무래도 아르헨티나 여행, 망한 거 같다.
와.대.단.하.다.
라는 느낌마저 그저 이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느껴야 하니까 작위적으로 만드는 건지,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지만 몸이 힘들다 보니 마음마저 그 흥을 죽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껏 무겁고 불쾌함만 쉽게 감지해 내는 이 몸을 어서 숙소에 뉘이고 싶다.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은 많이 가뿐해졌다.
하지만 한번 떨어진 마음의 온도는 여전히 미지근하다.
그냥 우유니를 보고 돌아갈 걸 그랬나. 여기까지 보겠다고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우유니의 밤 풍경도 볼 수 있었을 텐데.
마음에서 흥이 떨어지니 생각도 청승맞아졌다.
18시간의 버스 이동과 35만 원 안팎의 비행기 이용 중 나는 망설임 없이 비행기를 이용했다.
청승맞은 마음에 어울리려나.
세상의 가장 끝에 있는 마을, 우수아이아에 가기 위해서.
지구의 태곳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파타고니아가 시작되는 곳이며 최남단의 조용한 마을 우수아이아.
티에라 델 푸 에고 국립공원, 마르티알 빙하 등 작은 마을에서도 볼거리는 넘치지만 나는 저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펭귄 투어 코스에 있는 비글 해협의 에클레어 등대.
저 바다 너머에 남극이 있지만 사람들이 사는 곳을 세상이라고 한다면
정말 세상의 남쪽 끝...
몇 시간이든, 며칠이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품고 돌아갔을까.
'끝'이라는 말이 갖는, 절망감이 묻은 우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펭귄들의 몸짓은 너무도 활기차다.
우리는 매일 끝을 살아내고 다시 아침이라는 시작을 맞이하지 않냐고.
'끝'이라는 것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도 있지 않겠냐고.
적당한 끝맺음을 하지 못한 것들은 그 얼마나 지지부지 하더냐고.
'끝'이란 축복이기도 한 게 아니냐고.
하지만 시작할 게 없는 끝도 있지 않은가.
가장 두렵고 절망적일 수도 있을 끝은 그것이지 않은가.
차가운 바닷바람에 머리는 한없이 헝클어지고
슬렁슬렁 머리를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살짝 가벼워져 있다.
그래, 여기가 세상의 끝, 그리고 내 남미 여행의 끝.
이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이 낯설고 신비로운 풍경들을 품고 내게 익숙했던 내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