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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다.

이혼일기, 마지막 상담 episode 1.

by 검정멍멍이




변화는요,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힘을 뺀 상태에서 저절로 되는 거예요.
그리고 왜 변했냐?

상담 때문이냐,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이냐,
책 때문이냐, 몰라요.
끝까지 몰라요.

그냥 모르는 채로 가는데
어쨌든 상담을 했던 시도 자체가
변화의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겠죠.

모른다


지난 상담 끝무렵 선생님이 건넨 말을 곱씹으며 한 주를 살았다. "변화는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냥 모르는 채로 가는 거다." 오늘은 벌써 10번째 변화를 시도하는 날이자 대망의 마지막 날이었다. 처음 상담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한 가지 결심을 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나에게 생길지 모르겠지만, 이 길의 끝은 밝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가겠다고. 그렇게 씩씩한 마지막을 꿈꾸던 내 상상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큰 이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게 뭐라고 멜랑꼴리한 기분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잘 지내셨어요? 오늘은 10번째 상담을 하는 날인데, 제 나름대로 다짐하고 목표했던 마지막 상담이네요.

─그렇네요. 오늘이 마지막 시간이면 상담을 잘 마무리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볼게요. 지난번에 제가 보내드렸던 영상 보셨어요?


선생님은 알랭드 보통이 우리 감정에 대해 말하는 영상을 공유해 주셨다.


“내 마음을 모르겠어요.” 감정을 해석할 줄 모르면 고통이 따른다. 감정기복 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의 특징 | 알랭 드 보통 https://youtu.be/_W00B5y_v6A?si=fFIci9_vQ36zTQFg




─네 봤어요. 많이 봤어요. 오기 전까지도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정리해 봤고요. 이 상담을 통해서 진전된 것도 많겠죠. 무엇보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또 뭔가 마음이라는 게 목표한다고 해서 딱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닐 테고요...


─......


─음... 영상을 통해 느낀 핵심은 제가 가지고 있는 불안이라는 감정인 것 같아요. 불안으로 말미암아 그 불안을 잠재우려고 화라는 감정을 만들어냈고 그 화라는 감정에 오히려 나 자신이 휩싸여 버린... 그런 패턴이 오랫동안 반복됐었겠다는 생각을 좀 해봤거든요. 오랜만에 다시 읽었던 <미움받을 용기> 책에서도 인상 깊었던 구절이 영상에서 제가 느꼈던 바와 뭔가모르게 맥이 맞닿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나 인내심이 부족해서라기보다
화 말고 다른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대해
몰라서 일 수 있다."


─......


─사실 아들러가 좀 극단적으로 비유한 것 같긴 한데,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과격해지는 게 아니라 과격해지고 윽박지르고 화를 냄으로써 상대방을 통제하거나 내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화를 이용하는 거라는 관점이 제 나름대로는 꽤 납득이 되더라고요. 그러면 내가 화 말고 다른 소통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을 좀 더 해봐야 되겠구나 하는 고민도 해봤어요.


─......


─이런 측면이 제가 앞으로 풀어가야 될 하나의 실타래인 것 같아요. 우선 제가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던 그런 불안이란 감정 그리고 불안을 덮기 위해 화라는 감정으로 '동기부여'처럼 추진 동력으로 삼았었던 패턴을 버리거나 바꿀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지난 한 주는 작은 일이라도 뭔가 좀 마음이 불쾌하거나 썩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노력을 해봤는데 아무튼 뭐 쉽진 않더라고요. 오랫동안 계속 훈련을 하면서 또 저를 이해해 가봐야 될 것 같아요.




─집에서 있었던 거나 떠오르는 거 얘기해 주세요.


아차 싶었다. 지난 시간에 그렇게 강조해서 말씀해 주셨었는데... 선생님의 말에 '아... 또 내가 상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생각만 나열하고 있구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마지막 상담인데 왜 이리 선생님의 반응이 시큰둥할까 고민하며 흔들리던 눈동자를 멈출 수 있었다.



─집에서요? 이제 뭐 휴직하고 쉰 지 한 얼추 한 달 됐거든요. 불안이라는 감정이 계속 올라오는 거를 느꼈어요.

─언제 느끼셨어요? 어떤 순간에?


─그냥 사실 계속 제가 루틴을 갖고 해 오던 것들이 지난주부터 조금 무너졌거든요. 운동하고 책 읽고 글 쓰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나름대로의 루틴을 만들어서 해 왔었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강박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는 생각도 있다 보니까... 너무 스스로를 몰아 세우지말자. 지금 은 나를 돌아보고 쉬기로 결심했잖아." 하는 생각이 상충되다 보니까 그게 뭔가 또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 같더라고요.


─그냥 어느 순간에 불안을 느끼셨어요? 뭐 하고 있을 때? 아침? 저녁? 누구랑 있을 때?

─그냥 혼자 있을 때, 집에서 혼자 있을 때요.


─혼자 어디? 안방? 본인 방에서요?


─제 방이요.

─책상에서? 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요. 원래 해야 되는 글을 쓴다든가 책을 본다던가를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어요?


─옛날에 좋아했던 미드를 다시 본다던가...


─뭔데요?


─프리즌 브레이크라는 미국 드라마요.

─그래서 그걸 보다가 문득 불안하다는 걸 느끼셨어요?

─네. 근데 그 불안감을 잠재우려고 게임을 한다든가, 드라마나 영화에 몰입한다던가 하는 패턴이 좀 있거든요.


─여하튼, 거기 책상에 앉아서 불안할 때 어떤 느낌을 가지고 내가 지금 불안하다고 알아차리셨어요? 어떻게 알아차리시게 됐어요?

'왜 해야 할 것들을 미뤄두고 계속 드라마만 보고 있을까?' 죄책감 같은 불안한 감정을 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거든요.


─생각을 하고 계셨네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불안한 거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결론이 나신 거예요?


─네. 의식한 거예요.


아! 실제적으로 불안을 느끼신 건 아니군요?


─그러니까 계속 미드를 하루 종일 보고 있는 저를 보면서 '불안하네 지금? 불안하니까 이걸 보고 있구나.' 이렇게 느낀 거죠.


─아, 그렇게 추측을 하신 거군요.


─그걸 추측이라고 해야 되나요? 저는 느꼈는데...


─그러니까 뭘 느끼셨냐 여쭤보는 거예요.


─불안을 느꼈죠...


─불안을 다른 말로 해보세요. 몸에 뭘 느끼셨나요? 아니면 마음에 뭘 느끼셨나요? 어떤 느낌을 느끼셨나요?


─어... 불안을 느꼈는데... 허허...


불안을 느꼈다는 말에 더 이상 무엇을 덧붙여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계속되는 선생님의 질문이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다.




─뭘 가지고 내가 불안하다고 알아차리게 됐나요?


─어떻게 설명해야 하죠... 저는 제가 느낀 대로 설명을 드린 건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불안'이라는 건 그냥 명사일 뿐이에요. 뭘 가지고 어떤 단서로, 어떤 자극으로 그걸 느꼈냐...


─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평소에 하던 루틴을 하지 않고 미드를 하루 종일 보고 있고 그걸 계속 그거 보고 있는 저를 보면서 불안을...


─그 상황 속 내가 어떤 모습이었냐는 거죠.


─내가?


─아... 제가 어떤 대답을 기대하냐 하면... 가슴이 좀 쿵쿵 뛰어요. 아니면 뭔가 이렇게 속에서 일렁일렁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것도 아니면 막 조바심이 나고...


선생님이 주신 힌트를 잡아 얼른 내 말을 이어갔다.




─조바심이 났으니까 불안하다고 느낀 거고 뭔가 답답하다고 느낀 것 같아요.


─답답하고 집중도 안되고...

─네. 이걸 왜 보고 있지 하면서... 아! 이건 또 생각이죠? 아무튼...


가능하면 몸의 감각을 뭘 느끼셨는지 알아차리시도록 도우려고 제가 계속 질문한 거예요.

─아.... 몸의 감각을...

지금 이야기하시는 걸 가만히 들으면 이 감각적인 것들하고 좀 이렇게 약간 떨어져 있어요.


─맞아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 느껴진 감각을 제가 자각하고 있어야지 감각이 살아나는 거잖아요.

─기억하지 않아도 그때를 떠올리면 보통은... 당시의 감정이 기억이 나거나 느껴지거든요?

─음... 그런 거라면, 그냥 심장이 답답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은 답답한 느낌...


─네.


─답답함...


가능하면 몸의 감각이나 감정이 조금 더 나의 중심에 가까워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상당히 머리로만 살게 되거든요. 회사 가고 뭐 어떻게 하면 더 일을 잘할까? 아이는 어떻게 하면 저 잘 키울까? 이걸 먹고 또 저걸 먹으면 칼로리가 어떻게 될까? 이런식으로 살게 되거든요.


그게 굉장히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는 거예요.



─와... 모르겠네요. 도저히 모르겠어요.


─네. 그게 아주 좋은 대답이네요.

─마지막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지금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건 선생님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건 아니고 조금 더 방향을 잡고 싶어 하시니까... 예를 들어드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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