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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un 27. 2024

어른이 된 자녀에게
나는 어떤 어른으로 비칠까?

'부모정신'이 곧 '시대정신'

'어른의 어른'이라는 5글자

가 내 가슴에 깊이 박힌 것은 연년생의 두 아이가 모두 어른이 되면서부터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작년 둘째 녀석의 입대영장이 나오면서였다. 아이들의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땐 그래도 아직 학생이니까. 했는데 둘째 녀석의 입대영장이 나오니까 '어이쿠!' 싶었다.


난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싶은 안절부절한 내 모습에 직면하면서 어른이 된 자녀 앞에 난 어떤 어른일까?를 자꾸만 나에게 묻고 나의 매무새를 매만지게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회사에서 강의를 초청받았을 때도 난 어른을 상대로 교육을 했었는데 그것과는 너무나 차원이 다른 설레임, 아니, 설레임이 아니라 약간의 불안감이 들었고 그 불안감은 '뭔가 부족하다'는 걱정과 조급함으로 분쇄되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무지한 나를 들춰내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 눈에 비친 어른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12살의 키루스에게 비친 어른들의 모습, 

"저는 모든 분의 몸과 마음이 불안정한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그분들 스스로 저와 같은 소년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노래하는 데 빠져 있었으며, 가수가 노래하는 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도 그가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불렀다고 맹세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모두 일어서서 춤을 추게 되었을 때 박자에 맞춰 춤을 잘 추기는커녕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습니다(주1)."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비위를 맞추고 우기고 의미없는 박수를 보내는,

서로가 함께 있지만 남들 위에 서기 위한 힘자랑에 열을 올리고 경청과 공감은 혀끝에서만 끝나버리는,

내 주변에도 그런 어른들이 참으로 많다. 


실제 밥을 먹는 식당에만 가도 두어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내 생각에) 의미있는 얘기보다는 가진 것, 아는 것, 가본 곳, 남들 뒷담화를 이야기하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아이패드나 핸드폰에 넋을 잃고 있다가 '먹으면서 보라고!' 냅다 소리지르는 엄마나 아빠의 말에 먹는 재미보다 밥그릇을 비워야 하는 의무감이 가득한 숟가락질을 하며 그것을 본 아빠는 꼭 빠뜨리지 않고 한마디 으름장을 놓는다. '안 먹으면 밥그릇(또는 핸드폰) 치운다!'라고. 


흔히 볼 수 있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은 다수가 그렇다는 의미를 함축하기에 나는 19살부터 노인까지 나이를 막론하고 '어른'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들이대는 잣대에 나를 한번쯤은 견주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어른의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만한 인물도 못되고

어찌 해야 어른의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어른을 가르칠 자격도 없고

내가 그렇게 어른의 어른이 되어 있느냐? 라는 질문에서도 자유롭게 '네!'라고 답하기 어렵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른의 어른'이 좀 되어보면 안될까요? 라는 제안정도는, 

나도 당신도 그렇게 함께 자기 자신을 거울에 한 번 비춰볼래요? 라는 권유정도는,

각자가 혀와 눈빛과 손길의 미세한 움직임을 체크해보면 어떨까요? 라는 부탁정도는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사람의 눈초리가 아이들의 영혼을 불로 그을려 시들게(주2)할까봐 아이들은 오지 말라고 당부하던 니체의 말이 생각나 내가 혹 아이들에게 접근하면 좀 꺼려지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다 싶은 맘이다.


이쁘게 곱게 사랑 듬뿍 주고 키우기도 아까운 내 아이인데 

영혼을 불에 그을리게 할 어른이 나라면 안되지 않겠나 싶고

내 옆의 누구도 그러지 말았으면 싶고

그래야만 나의 아이들도, 당신의 아이들도 좀 더 맑은 영혼을 가지고 서로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맘에 부탁하는 것이다. 


이 아이의 영혼이 불에 그을려 시커멓다면 저 아이에게도 그을음을 묻힐 수가 있고 자연스레 묻기도 할 것이니 내가 내 아이만이라도, 함께 밥먹을 때 보여지는 태도만이라도 의식하고 행동한다면 좀 낫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탄천 산책로를 걷다가 강아지를 데리고 오른손에는 담배를 피며 걷는 중년남성이 앞에서 마주보고 걸어오는 초등학생 4명과 마주쳤다. 용감한 학생 한명이 '아저씨! 여기서 담배피면 안돼요!' 했는데 이 아저씨의 반응엔 나도 놀라서 발길을 멈춰 서야 했다. 그냥 '어이쿠! 미안하다.' 하면 그 뿐인데 '이 노므 자식이 어른한테~~ 블라블라~~' 초등학생은 억울해하며 친구들에게 재차 물었다 '여기 금연 맞지? 내 말이 맞지?'라고. 아이는 아이다웠다. '내가 잘못 알았나?'싶은 의구심에 빠진 그 순수한 눈빛.


지금 이 글이 그냥 내 눈에 포착된 하나둘의 현상에 대해 뭔가 정의로운 생색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확률이 좀 무섭기 때문이다. 바깥외출이 거의 없는 내가 어쩌다 만난 모습이 이렇다면 이런 상황은 아주 자주, 다양하게 벌어진다는, 확률적으로 상당히 높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고 내가 뭐라도 되는 것마냥 한탄, 비탄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이런 소소한 것이 모여 문화가 되고 

그런 문화를 가진 사회에서 내 아이가 살아야 하니... 

가랑비에 옷젖듯 아이들의 영혼에 서서히 불에 그을릴 듯 검어진다면...

좀 아니 많이 찜찜한 것이다.


우리 두 녀석은 어떤 어른으로 자랄까....?

내가 그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으로 비칠까? 

아이의 눈에 비치는 어른보다 

어른이 된 자녀의 눈에 비치는 게 

왜 더 무섭고 무거운 의무감이 드는 걸까?


'엄마'라는 이름으로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은 좀 비겁한 것 같고 

나는 내 아이들에게 닮아도 되는, 본받아도 되는, 따르고 싶은 그런 어른일까?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어른으로서 냉정하게 바라보듯 

어른이 된 내 아이가 

나의 삶을, 삶을 대하는 자세를, 더 나아가 나의 인격과 사람으로서의 자질을 어떻게 바라볼까?


오늘은 그저...

이 글을 읽는 어른들에게 

나도, 당신도 이런 질문 각자에게 한번씩 해보는 게 어떨까요? 라고 묻고 싶을 뿐이다.


[저의 견해를 조금 추가해볼까 하여...]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054


* 부모라면 누구나 함께 공부하고 자신의 굳은 인식을 깨고 새로운 지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https://guhnyulwon.liveklass.com/classes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https://cafe.naver.com/joowo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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