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Oct 12. 2022

내 뒤에 숨어 찰나에만 등장하는!

오만과 겸손에 대한 소고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자문을 하다 보면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사람을 좀 쓰면 어떨까요?'라는 말이다.

순간, 내 속에선

'아...!'

탄식의 신음이 터진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내뱉는 평범한 말인데

이 말 한마디는

그 친구의 단정한 머리, 각잡힌 셔츠깃, 깍듯한 인사, 뜨거운 열정, 꽉채워 넘칠듯한 지식, 친절한 말투

모두를 무색케 한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말은

내면적 사고의 외면화다.


나는 두 눈을 그에게 더 가까이 위치시키며 말한다.

"사람은 쓰는 게 아니야..."

5초간 나와 그의 눈은 정면으로 대치하며 강력한 에너지로 소통한다.

대립인지 연결인지 충돌인지

혼돈의 5초가 지나면


예외없이 핑계가 따른다.

"아.. 다들 그렇게 말해서 저도 그냥.."


"핑계대지 말고!"

일축해버린 후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도 너는 그러지 마.

성공하고 싶어서 이렇게 열심인 거잖아.

너의 오만은, 자만은, 건방은 이렇게 금새 드러나.

기본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지금처럼 느닷없이 상대에게 들켜.

성공. '누구나' 할 수 있는데 그 '누구나'의 기준이 높단 말야.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게 성공이야.

근데, 그게 간절한 거잖아.

기준을 높이지 않으면 그 '누구나'에 너는 끼어들기 어려워.

'아무나'가 되려면 내면에, 들통나면 큰일날 구멍들을 메꾸면서 가야 해.

겉이 화려해지면 질수록

내면의 구멍이 더 커지는 건 예외가 없더라구!"


내가 월급을 주기 때문에 '사람을 쓰는' 권리를 얻었다는 전제는

내 사고에 상대를 지배할 수 있다는, 지배해도 된다는, 내가 지배우위에 있다는

착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인권인권인권 하며

회사가, 경영주가, 상사가 자신을 '쓰지'않고 '존중'해주길 바라면서

내가 월급줄 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언어가

'사람을 쓴다'라니...

이 모순된 사고를 어찌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모순된 지배구조를 머리속에 지니고 있으면서 어떻게 공감이나 팀웍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내 사고(考)는 내 손실의 원인이다.

내 마인드는 나의 결과이며

내가 가진 물질은 나의 정신의 성적표다.


고용(雇用)의

사전적 의미는 '품을 팔아 그 삯만큼 사람을 부린다'이지만

심정적으로 우리는

고용주입장에선 일하는 것보다 더 주는 것 같고

피고용주입장에선 일하는 것보다 덜 받는 것처럼 느끼게 마련이다.

'입장차이'는 관계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역지사지', 상대입장에 서보는 것은 사전적으론 가능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수양을 갖춘 자여야 가능하다.

우리의 삶은 결코 사전적 의미나 과학적 객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만하다는 거

건방지다는 거

턱 쳐들고 눈 내리깔고 있는 힘껏 가슴을 벌린 채 허리에 손을 얹고 짝다리를 짚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이런 사람은 그래도 자기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진실되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내면에 오만과 자만과 건방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기에

상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자신이 당한 무시를 계산해버려

일의 능률보다 갈등의 속도를 더 빠르게 운용시킨다.

'관계'란 계약서의 문장대로라기보다 상호간의 잠재적 이해관계에 의해

운용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내가 누군가를 쓰려 하니

계산이 빠른, 쓰이지 않으려는 상대와

갈등이 생길 수밖에

그 골은 깊어질 수밖에.

한쪽은 쓰려 하고 다른 한쪽은 더 쓰이지 않으려는 관계.

엉킬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많은 노사문제가 발생하는 바탕에는

개인의 이러한 본능적인 감각이 관계시스템에서 자동적으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예외없이 현상은 축적된 이면에 의해 드러난 결과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그렇지! 자신있게 투자할 때는 해야지!

사람도 몇명 쓰고! 자신있게!!!!' 라고 그냥 말해버리는 것을 보면,

우리는 모두 상황의 이면을 무시하는데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내재된 오만'은 때론 '자신감'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내 초점이 상대보다 나에게로 향하게 해보면 어떨까?


상대를 쓰는 게 아니라

나는 나를 잘 쓰이게 하고 상대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잘 쓰이게 하는.

한단계만 더 이면을 들여다 보고

'내가 누구를 쓰는' 이 아닌,

'각자가 스스로 잘 쓰이는' 이란 말이다.

독.립.적.인.상.호.의.존.관계로서 상호작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독립적이면서 상호의존적이라는 이 모순된 진리, 양극의 균형에 답이 있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잘 쓰이는 사람이 되면

상대는 나를 필요로 하기에

관계는 능동적으로 순환되며 여기서의 상호작용은 '상호존중'의 싹을 틔운다.

이렇게 독립적이면서 상호의존적이어야 '상호존중'의 관계가 시작되어

말 그대로

'공감'하며 '공유'되는 관계로 '공진화'라는 질적 진화를 일으키는 '팀웍'이 탄생한다.


상호존중관계일 경우,

오만을 민망으로 바꾸는 것은 훨씬 수월해진다.

민망으로 전이된 오만은 스스로의 성찰로, 상대에게 사죄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 연결 끝에 자리잡힌 마음가짐을 우리는 겸손이라 부른다.


물론,

살다가 익숙한대로 내뱉는 수많은 말들,

생각없이 그냥 편한대로 나온 말일테다.

그런데. 생각없이 말하지 말란 말이다.

적어도 내 말이 내 인생에 방해가 되게 하진 말란 말이다.

적어도 내 말이 내게로 올 기회들을 차단시키게 하지 말란 말이다.

적어도 내 인생이 나를 비웃게 냅두지 말란 말이다.


손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 가지런히 붙이고

상대의 어깨 높이에 나의 시선을 자리잡고 마주하는 것이 외적 겸손이라면

내적 겸손은

내가 평소에 하는 말과 행동의 뒤에 숨어서 지독할 정도로 깐깐하게 나를 검열하다가

찰나에 말과 행동속에 잠시 등장하여

나를 '믿을만한 존재'로 인식시키고 사라지는 내적수양의 드러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의 현실화' 단.순.공.식. = 정신의 임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