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와 현혹에 대한 소고
훈련되지 않은 말(馬)이 뛰어다니면 어지럽다.
말이 에너지를 뿜어낼수록 어지러움은 심해진다.
게다가 지구력까지 뛰어나 계속 뛰면...
나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맥락(context)을 모르면
말의 뛰는 열정, 부지런함, 지구력에 감탄한다.
순간 모두가 말의 에너지에 정신을 뺏겨
함께 뛰려 한다.
서서히 내 정신은 다른 침범을 허락해버린다.
닮고 싶어하고
배우려 하고
심지어 추앙까지 한다.
물론,
훈련되지 않은 말때문은 아니다.
훈련되지 않은 말이
너무 건강하고 너무 열정이 넘치는 건 잘못이 아니니까.
나를 위해 말이 뛴 것이 아니니까 말탓이 아니다.
내 시야가 좁았고
내 감정이 그 말의 열정따라 흥분했고
내 마음의 기준이 약했고
내 두뇌가 맥락을 짚어내지 못했으며
내 이성이 감정에 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래 알아야 알 수 있고
깊이 봐야 이면이 보이고
앞뒤를 살펴야 맥락이 짚이는데
내가 몰랐고 얕았고 짧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키우는데에 게을렀던 탓에
이렇게 뛰는 말앞에서 구토직전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이 지경이다.
주변은 온통 자석이 된 말의 에너지에 딸려가고 있다.
동요(動搖)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허락되는 정서다.
특히, 내가 못가진, 나보다 더 큰 정서를 만나면 누구나 쉽게 동요된다.
동요는 분위기를 이끌고 하나는 둘이, 둘은 셋이 되면서 더 큰 물결을 이루면
심지어
동요된 인간은 현혹(眩惑)에 인계되면서
자기 정신을 잃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동요된 정신을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하고 재빨리 손잡아버린 현혹은
나의 시야와 감정과 두뇌와 이성 모두를 둔감시키고 심지어 빼앗아버린다.
이렇게 내 육신을 빼앗기면 시간도 돈도 지식도 내게서 나갈 차비를 서두른다.
문제는 판.단.의 능력을 상실하여
선.택.의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들통나고
알게 된다.
말이 지치는 순간 박수치던 이들의 열정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따라 함께 뛰었던 그 곳은 그저 허허벌판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시야를 막았던 말에 화풀이하며 뿔뿔히 흩어진다.
그리고 한마디 하겠지.
'말이 너무 신나게 또는 똑똑해보여 또는 열정적이어서 나도 모르게...'라고.
나를 키우면
내 앞에서 제 아무리 신나게, 열정적으로 뛰는 말일지라도
훈련받지 않은 말인걸 알아챌 수 있다.
나를 키우면
뛰는 말 옆에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며
자신이 뛰어야 할 때를 기다리는
조용히 풀뜯는 말이 내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나는 나를 키움으로써
어떤 말을 타야할 지 알게 되고
그 말에 오름으로써 허허벌판이 아닌, 목적지로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지에서
나의 지혜를 공유할 또 다른 구토직전의 누군가를 만나겠지.
그런데 가만.
혹여 자신이 훈련받지 못한(또는 안한) 말이라면
'도자기박물관에 들어간 코끼리'가 된 듯
제발 얌전히, 죽은 듯이, 미동없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무지가
자신의 에너지가
자신의 꾸준함이
자신의 웃음이
타인의 시간과 감정과 앎의 퇴보를 유도할 수 있으니까.
나를 알고
내가 서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제대로된 언행을 세상에 내놓는 것.
나를 키워내는 것이
궁극의 이타다.
크리톤이 죽기 직전 소크라테스에게 '이제 남은 우리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했다.
이 대답은 우리가 삶에서 어떠한 동요가 나를 유혹하더라도
내가 현혹되지 않는 기준이 될 것이다.
진정 자신을 키우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이타다.
"크리톤이여! 내가 늘 말해온 대로 하면 되는거야. 아무것도 새로운 것은 없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거지.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네들은 나를 위해서, 나의 애들을 위해서도, 또 자네들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일이 되는거야. 새삼스럽게 약속을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만 하면 되는걸세" - 소크라테스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