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빛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
북극성을 믿고 달릴 수 있는 자는
어둠을 견뎌본 자뿐이란다.
아이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익보다 '손실'에 민감해.
양손에 과자를 쥐고도 한 손을 펴지 못해 새로운 것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이익에 민감하면 손의 것을 놔버릴텐데 본능적으로 손실에 민감하니 새로운 이익을 앞에 두고도 생각을 깊이 하거든. 마치 깊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생각은 머뭇거리는 시간만 길게 하지.
이걸 놓을까 저걸 놓을까, 지금은 때가 아닌가...
포기도 못하고 얻지도 못한채 그렇게 귀한 시간과 정신과 정성이 오히려 낭비 돼. 손에 잡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 새로운 이익앞에서 멈칫하지.
손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삶이 손실이 된단다.
항상 초점을 둔 곳에 에너지가 집중되니까.
망설이다가 이도저도 아닌,
어리석은데다가 계산도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런데 손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아.
손해볼 것, 잃을 것을 고민한다는 것은 이득을 직관적으로 안다는 의미도 되잖아. 손실, 잃을까 싶은 두려움, 공포, 좌절감, 고통, 불행. 이 모든 것들은 다 없어졌으면 좋겠지? 사실 엄마도 그래. 갈등도 없고 고민도 없고 난관도 없고 가난도 없고. 이 모든 것들이 엄마도, 너희들 인생에도 없었으면 해.
그런데
그렇다면, 손실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자.
'부정정서를 유발하는 모든 것'을 '손실'이라고 개념화하면 2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첫째, 싫고 미운 것인데 왜 인간의 인생에 꼭! 누구에게나! 일어나지?
둘째, 이 보기 싫고 갖기 싫은, '손실'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야. 너희들이 엄마아빠없는 외국에서, 비록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학교에서 자유롭게 수학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지겹고 어렵고 힘든 점이 많겠지. 그런데도 즐겁고 신나게 수학할 수 있는 동기가 된 것은 '여기까지 와서~ 못 하면 안된다.'는 손실에 대한 공포때문이기도 하잖아. 거기까지 가서 공부하게 된 과거도 돌아보면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손실'이 널 그 곳, 그 자리에 세워둔 것이잖아.
그러니까.
손실의 공포는 너를 나아가게 하는 힘의 시작이기도 해.
때론 잠이 안와서 뒤척일 때도, 김치랑 찌개가 먹고 싶어도, 집에 오고 싶어도 참아야 할 때가 많지만 이 모든 '불편을 견디는 힘'도 '손실'에 대한 공포가 길러준 힘일 수 있단다.
네가 어떻게 바라보고 쓰느냐에 따라,
손실체감도 너를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끈단다.
불편체감도 너를 편하게 사는 방향으로 끌어가고
공포체감도 네게 단단한 내면의 힘을 비축하도록 돕지.
그렇다면,
그럴수록 네 욕구는 더 네게 달려온단다.
너를 도와야 하니까.
욕구 자신이 창조되어야 할 매개가 너니까!
네가 손실에 무너지면 자기가 창조되지 못하니까!
인간의 두려움은 '잃을까 싶은', 그러니까 '손실에 대한 공포'가 근원이야.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서운 게 없잖아. 영화에서도 많이 봤지? 그냥 막 가는 사람들. 무서운 게 없는 사람들. 또 너무 고통스럽게 아픈 사람들도 더 이상 삶을 붙잡으려 하지 않잖아. 그냥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뭐라도 하려는 모든 인간본성적 판단과 행위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잖아. '두려움의 근원은 손실에 대한 공포'라고. 흔히들 '뭐 까짓것, 잃어봤자 본전인데'라는 말, 손실이 없으면 사람은 두려움없이, 어쩌면 더 쉽게 시도하고 도전해.
그래서 두번째 질문, 보기 싫고 갖기 싫고 없애고 싶은 '손실'을 결코 없앨 수 없을거야.
그러니 우리는 '손실이 주는 삶의 가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엄마는 얼마전 책을 출간하고 또 사람들에게 노출되다 보니 관계도 더 민감하게 신경쓰이고 글도 더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워. 출간한 글처럼 살아야 하는 책임에 구속도 더 강해지고. 이 역시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란다. 엄마가 지금껏 쌓아온 시간과 정성과 지식이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는데 비판을 받으면 어쩌나?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지금껏 편하게 글을 썼는데 이 '편함'을 잃고 불편하게 부담되는 것도 싫고. 그래서 요 며칠 글쓰기가 두려워지고 두려우니까 계속 머뭇거리고 머뭇거리니까 이도저도 아닌 글만 계속 쓰고 그래.
그런데, 아이야.
편안함에 길들여진 사람은 결코 지속적으로 편한 삶을 보장받지 못해.
앞서 말했지만 '보기 싫고 갖기 싫고 없애고 싶은 손실'을 결코 없앨 수는 없잖아.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은 맞닥뜨려야 하잖아. 그러니까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으면 불편함이 쓰나미처럼 밀려들 때 감당하지 못해. 편하려고 대충대충 정리 안하고 살아 봐. 나중에 정리가 일이 되어서 하루를 몽땅 정리하느라 낭비하게 되잖니.
우리는 삶의 어두운 면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단다.
어둠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빛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니 감사할 줄 모르지.
그러다 어둠이 삶에 닥칠 때 어찌할 바를 몰라 당하지.
밝은 곳만 걸으면 어둠 속을 걷지 못한단다.
돈이 넘치다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대중에게 늘 환호받던 연예인에게 환호가 사라졌을 때, 늘 공부 잘한다고 칭찬받던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불합격했을 때, 늘 승승장구하던 자가 승진에서 누락됐을 때, 우리는 이렇게 삶에서 그늘진 곳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처참한 결과들을 수시로 봐왔어.
밝은 삶을 살기 위해선 어둠속을 더듬거린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단다.
어둠속에서만 보이는 것이 빛이야.
어둠에 익숙한 자여야 북극성을 보고 뛸 수 있어.
우리는 밤에만 별이 있다고 착각하지.
밝을 때도 별은 존재하잖아.
별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우리 삶도 매일 매일 하루하루 새롭게 주어져.
하지만,
어둠에 머물러 본 자라면 빛을 볼 수 있어.
어둠속을 걷고 뛰어본 자여야만,
북극성을 믿고 미지로 달려본 자여야만.
빛의 존재를 향해 어둠을 뚫고 나갈 수 있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이 안고 가야 할 손실의 총량, 어둠의 총량이 있어. 불편함, 어려움, 힘겨움, 참아야 할 모든 것들 역시 편함, 행복, 즐거움을 네 삶으로 데려오기 위함이야. 고통과 시련, 두려움, 공포 이 모든 '손실'처럼 여겨지는 어둠의 시간들은 네 인생에도 분명 있을거야. 하지만, 그 속에서 빛을 보아라. 어둠에 익숙해져라.
아이야,
힘들고 어렵고 불편하고 하기 싫은...
어둠 속을 더듬거리는 이 시간들은...
뒤돌아가고 싶고 멈추고 싶은 유혹일거야.
그리고 네게 이성적으로 따져보게 할거야.
그 다음엔 논리의 함정에 빠져서 마치 과거 경험이 다시 반복될 것 같은 두려움으로 널 휘감을거야.
큰 일은 큰 대가를 요구하지.
큰 결과를 가지고자 하면 큰 원인이 투입되어야 하지.
빛이 더 밝게 보이려면 더 칠흙같은 어둠을 요구하듯이 말이야.
네가 어둠속을 걷지 못하면 어둠은 더 네게 공포스러워질거야.
네가 손실을 이익으로 바꾸지 못하면 손실은 널 휘어잡고서 더 큰 손실을 몰고 올거야.
우리가 도망치면 적이 더 악을 쓰며 추격해 오는 것과 같이,
고통도 우리가 그 밑에 떨고 있으면 더욱 거만해진다.
고통은 잘 버티는 자에게 더 순해질 것이다.
고통에 대항해서 마음을 긴장시켜야 한다(주).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자리가 가장 적합한 자리(주2)라는 에머슨의 말은
치른 손실만큼 보상이 크다는,
그러니까 보상의 법칙에 의해 가장 적합한 자리라는 의미야.
그러니 아이야, 꼭 기억해.
어둠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빛 속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해.
어렵고 힘들고 외로움을 겪어보지 못하면 지금 누리는 평온과 행복, 안정과 같은 '빛'의 소중함을 깊이 자각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삶에 반드시 존재하는 어둠을 견뎌낼 수가 없어.
존재는 반드시 '대조'를 통해 힘을 얻는단다.
그러니,
북극성을 믿고 달릴 수 있는 자는 어둠을 견뎌본 자뿐이지.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느끼는 어둠은 곧 익숙해질 것이고
네가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손실'은 네게 더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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