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보는 행위'의 가치가 더해지고 있다.
새집을 바라보다
나뭇가지 하나의 힘이
생명을 보듬어 탄생시키고
이소시켰다는 사실이
보여질 때.
높이 매달린 벌집이
강력한 바람에도 버텨내는 힘에 감탄하다가
오히려 그 무게로
나뭇가지가 상대적으로 덜 흔들린다는 사실이
보여질 때.
하나의 눈발이 모이고 쌓여
이쁘기만 하다가
결국 따뜻한 햇살에도 결코 녹지 않을 뿐더러
인간까지도 설설 기게 만든다는
위력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보여질 때.
장작앞에서 그저 따뜻함 느끼며 이쁘게만 보다가
본체에서 떨어진 잔가지여야만
두터운 장작에 불을 지필
불쏘시개가 되고야 만다는 사실이
보여질 때.
모든 '보여짐' 안에는 이미 구조가 담겨 있고
모든 '찾아냄'의 위력은 '관찰'로부터다.
단순한 '보는 행위'는 시력(視力)에 의존한다.
의도담고 '보는 행위'는 지력(知力)에 의존한다.
의미를 찾기 위한 '보는 행위'는 염력(念力)에 의존한다.
관찰은 끝내
사물에서 의미를 드러내고
사태에서 본질을 드러낸다.
보이는 모든 것에서 보이지 않는 이면을 찾아내고야 만다.
살펴서 봐야 한다.
이는,
태도의 문제다.
대상을 지나치거나 비껴가게 두지 않고
앞서 닿은 눈을 거두고
마음과 정신을 꺼내
대상에 머무르게 시간을 배당하는 태도.
대상에 다가가되 침범하지 않으며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존재로서 느끼도록
영혼을 허락하는 태도.
이해와 결론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나의 의지를 스스로 거두는,
나와 거리를 둔 대상을 존중하는 태도.
대상을 '안다'는 이성의 잣대를 거두고
더 알고자 하는 이성의 행보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단념이며,
표피화된 사실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맥락을 찾기 위해
판단을 보류하는 태도다.
'보는' 행위는
'사실'을 인지시키지만
'살펴서 보는' 행위는
사실을 드러나게 한 '존재'를 자각하게 한다.
따라서,
관찰은 보는 시각행위가 아니다
의미를 찾거나
이미 존재하는 의미의 맥락을 발견하는
지각행위다.
그때서야 비로소
실체와 나는 연결되고
깊이를 함께 하며 일체성을 지닌다.
일체성은 나만의 사유에 결을 만들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나의 글이다.
의미의 논리를 내 안에서 만들어가는 생성작업이다.
나와 대상이 서로 비껴가지 않고
내 안에서 논쟁이 사라지는 지점,
거기에 윤리와 보편성이 공존할 때
주장은 설득이 되고
설득은 나를 세상에 들이밀어 세우는 힘이 된다.
그래서,
글의 시작은
관찰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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