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와 재회한 새벽, 읽기는 장면이 되었다.

'재독(再讀)'의 경험에 대하여.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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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난 2020년 읽었던 몽테뉴를 다시 찬찬히 읽는다.

읽었지만 이렇게 새롭게 읽히니

이 어쩔 노릇인지.


몽테뉴를 다시 펼친 이유는

사실 얄팍한 속내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들로 필사노트 시리즈를 만든다면

검색해서 나오거나 책 한권 달랑 필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그것이 탄생할 것이라는

욕심때문이었다.


물론, 욕심(欲心)이란 게 나쁜 것은 아니다.

'바라는 마음'에 무슨 잘못이 있으랴.

하지만 귀한 시간을 '바라는'것에만 집중하며

내실을 잃는 나의 태도는

분명 그르다.


그렇게 신사 중의 신사의 책을 다시 잡았을 때는 밑줄 그은 부분만을 다시 읽으려는 속내였지만 요즘 나의 새벽독서는 신사가 이끄는대로 내 정신을 온전히 빼앗기며 1350여장의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벽돌을 한장한장 다시 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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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더 큰 힘에 이끌리는 이런 나를 참 좋아한다.


얄팍했던 욕심은

이제껏 감지못했던 지적 허기를 일깨웠고

허기를 밀도있게 채우려는 욕심으로 가만히 방향을 틀더니

'바라는 마음'을 정련하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나는 '정련당하는' 묘한 쾌감을 즐기고 있다.


처음 몽테뉴를 펼쳤던 2020년에는

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 크세노폰, 플루타르코스,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 등의 책을 읽기 전이었기에 신사가 인용했던 그들은 단지 신사의 글 속에 묻혀 있던 이름 모를 인물이었을 뿐이었으니 나는 신사에게 의존한 채 그들의 어휘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나는 신사의 글만을 읽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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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사가 인용한 대다수의 책을 읽은 지금은,

인용을 통해 신사의 사고가 어디를 향하는지,

인용된 그들이 신사의 사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로 인해 나의 사고는 어디를 조형해야 하는지

활자가 아닌 행간으로,

이해가 아닌 의미로,

기억이 아닌 경험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이 느낌은

신사의 '사유'가 내 안에서 '장면'을 제작하며

'읽는' 능동의 행위가

'벌어지는' 수동의 행위로

나를 이끈다.


'감각적 독서'라면 지나칠까.

'사유의 성숙'이라면 과장될까.

'신사와의 동행'이라면 건방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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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 크세노폰, 플루타르코스


과장되고 건방이라도

2020년 신사는 내게 '몽테뉴'라는 한명의 스승이었지만

2026년 지금의 신사는

여러 성현들을 거론하며 자신의 사유를 토론하는 나의 동반자가 되었다.


오늘 새벽, 나는 이 느낌이 절정에 달했다.


신사가 탐독했던 키케로세네카는 이미 여러번 읽었지만

읽다가 덮었던 베르길리우스도, 호메로스도 다시 꺼내어 마저 읽어야 하고

신사로 인해 잠시 옆으로 밀려났던 플루타르코스를 당장 다시 펼쳐 읽어야겠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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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는 특히, 플루타르코스를 추앙했다.

그를 번역했던 자크 아미요(주2) 덕에 '우리는 감히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었다(주1)'고까지 말하며 '플루트르코스가 자신에 관해서 말하는 문장을 읽고 있었다(주1).'고 하니

나는,

내가 그토록 꿈꾸는 신사의 옥탑방에

그와 함께 앉아

그가 부른 사상가들을 탐닉하는 느낌에 빠져 버렸다.


스크린샷 2026-01-08 102012.png 몽테뉴 옥탑방 서재(구글이미지 발췌)

책을 읽다 지적허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지적혀영은 지적채움으로

이는 다시 지적겸허로 이어지고 있다 감히 자조하는 지금,

나는 지적 허기가 아닌,

지적 무지의 바다에서

하나둘 '앎'을 경험하는 지금에 서 있다.


어느 때인가는

작가와 함께 동거하는 느낌에 사로잡혀

작가의 사유의 길을 함께 걸으며

그의 사상에 나의 사고도 형상으로 이어지는 경험에 들뜬 적도 있었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069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859


그런데 오늘 새벽,

나는 그 너머를 경험했한 듯하다.

나는 신사와 나란히 앉아 그가 추앙했던 플루타르코스를 나누고 있었다.


활자가 입체가 되고

입체가 장면이 되며

장면이 상영이 되니

나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신사와 밀회를 속삭이고 있었다.


당신이 불러낸 플루타르코스와 마침 나도 함께 있다고,

이 내밀한 속내를 나눌 상대가 없어 외롭다고,

이토록 섬세한 감성을 종이에 옮기기에 영혼이 준비가 덜 되었는데

이를 어쩌면 좋으냐고...


책을 읽는 것은, 특히

다시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일방적으로 혼자 말하던 처음을 지나

그와 재회하며

그가 만들어낸 사유의 방향에서

덮혀 있던 층위를 발견하고

층위마다 다른 결을 함께 통과하는 경험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사유는 더 이상 나의 머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작가도 글도 아닌

나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곧게 세우며


마침내,

작가의 층위 꼭대기에 올라,

나는 더 이상 그의 독자가 아니라,

그 사유가 벌어지는 자리에 그와 함께 서 있는 것이다.


그 층위에서 작가와의 재회는

'사고를 위해 읽는' 행위를 '느끼며 사유로 나아가는' 행위로,

'이해를 너머 해석'했던 사유를 '해석을 너머 경험'하는 사유로,

'작가에게 주입된 일방적 읽기'를 '작가와 함께 토론하는 입체적 경험'으로 날 세운다.


신사를 다시 만나길 참 잘했다.

얄팍한 욕심을 갖길 참 잘했다.

이 새벽,

이토록 깊고 섬세한 감성을 내가 느끼게 될 줄

나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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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참여신청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3Z4R2VoCVZjnu1j7FOnxVFrJ1a5LaNKu4G7H4Q3GRHTvBsQ/viewform

공연문의 : 건율원 (010-9056-9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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