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을 치우다 세계를 만난 순간

by 지담
프리미엄 썸네일(작은) (29).png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하나의 티끌도 세계를 머금어 있고,

찰나의 생각도 끝없는 영겁이어라.


의상스님의 일체성은

내가 좋아하는 블레이크의 시에도 등장한다.


한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주1)


KakaoTalk_20260219_080506090_01.jpg


논리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고 자신할 수 없는

무한성과 일체성, 통일성, 전체성.

나는 이 위대한 원리가

우리집 마당 곳곳에 있음을 발견한다.


날씨가 영상으로 오르자 눈이 녹고 언땅도 녹고.

곧 봄이다.

올핸 비탈에 호박을 심을 요량이다.

호박이 주렁주렁 열리는 상상을 하며

드넓은 비탈의 아무렇게나 버려진 나무와 풀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KakaoTalk_20241007_084705465_10.jpg 이사와 베어낸 나무들을 비탈 아래에 마구 던져놨었다

이사와 베어버린 나무는 아무 대책없이 비탈로 던져져 1년이 지나도록 방치되어 있었지만 치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날 움직인 동기는 무조건 '호박'이었다. 일조량도 많고 너른 비탈에 주렁주렁 호박이 열리는 상상만으로 힘든 줄 모르고 나는 비탈에 비스듬히 선 채 매일 몇시간씩 나무와 낙엽들을 치웠다.


때론 미루고미루고 귀찮고귀찮게 날 짓누르던 문제가

아주 사소한 동기로 순식간에 해결된다.

비탈청소가 그랬다.

1주일 바짝 하니 이리 넓고 깨끗해진걸.

1년을 가슴앓이를 했던 것이다.


스크린샷 2026-02-19 143135.png 마당 오른쪽으로 가파른 비탈, 저 아래 개울까지 깨끗이 치웠다!


어림잡아 45도정도의 경사진 비탈.

아직 완전히 녹지 않은 흙이 내 손을 거부한 채 버텼지만

나무를 걷어내고 쌓인 낙엽도 비탈에 엎드리다시피해 박박 긁어내리니

그 속에 숨겨졌던 기특한 녀석들이 내 가슴을 벅차게 울렸다.


아랫집 비탈에서 땅속으로 연대를 이어 드러난 작은 두룹 몇 개.

그 무거운 낙엽과 나무들 사이에서도 싹을 틔워

어떻게든 자신을 뻗어올렸던 아기 주목나무와 소나무.

낙엽이 덮고 그 위를 눈이 짓눌렀지만

끝까지 푸름을 잃지 않았던 이름모를 들풀.


스크린샷 2026-02-19 143940.png
스크린샷 2026-02-19 143046.png
좌> 키작은 두릅들 / 우> 한뺨정도로 자란 아기주목나무
스크린샷 2026-02-19 143108.png
스크린샷 2026-02-19 143058.png
제법 50cm가량 키를 키운 소나무와 푸른색을 간직한 들풀들.


이들은

겨울을 거부하지도

봄만 기다리며 멈추지도

무겁다고 차갑다고 여리다고 다른 존재와 비교하지도 않았다.


겨울 속에서

겨울과 맞서지 않고

겨울을 통과하며 스스로 존재했다.


일체성은 대립이 아니라

대립을 포함한 채 존재하는 것이라 이들은 내게 보여준다.


물체들과 사태들의 유일한 시간은 현재이다.

(중략) 물체들 사이의 통일성에 따라,

그리고 능동적 원리와 수동적 원리의 통일성에 따라

우주적 현재는 전우주를 포괄한다(주2).


KakaoTalk_20260219_080506090.jpg


뿌리는 얼어 있는 땅과 함께였고

잎은 차가운 공기조차 희박했지만

약한 햇빛이라도 빛을 들이면서

눈과 서리와 함께 있었다.


땅과 공기, 빛, 물.

이 모든 요소가 하나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이 보잘것없는 들풀도 온우주와 연결된 채 살아 있었다.

그 어떤 존재도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존재의

통일성을 이들은 내게 보여준다.


이 다양한 의견은 사실 하나입니다.

두 개로 보이는 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떻게 백 개가 하나일 수 있는지,

어떻게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하나일 수 있는지,

어떻게 독과 설탕이 하나일 수 있는지 의심하지 마십시오.

단일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각기 다른 장미들로 가득한 정원을 지나면서

하나의 장미 향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주3)


스크린샷 2024-02-22 183844.png


매일 비탈에 매달리길 잘했다.

비탈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비스듬하게 한참을 서 있었더니 허리와 골반은 무지 아팠고 쌓인 낙엽을 박박 긁어대니 내 머리카락과 얼굴은 온통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버틴 시간 속에서 환희는 찾아왔다.


들풀은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았고

나처럼 겨울에 저항하지도 않았고

계절을 비난하거나 기다리지도 않았고

그저 자기 자리에서

조건과 하나되어 생존했다.


한송이 들풀은 자기 안에 무한을 쥐고 순간을 영원처럼 산다.

이 깡촌, 적막과 고요만을 친구삼은 나도 그리 산다.

매일 새로운 날, 새로운 발견이 이어지니

새로운 곳,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치 않나 보다.

나가지도 않고 여행도 싫다.


깊게 깊게 침잠하며 나를 꺼내고 글로 옮기는 것으로도

내게는 넘치는 새로움이 있다.

바로, 여기, 지금.


외롭고 적막한 침잠이 아니라

새로움을 들이는 침잠.

무겁고 침울한 고요가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진리 한바가지를 퍼올리는 고요.


나는 세계에 저항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나의 세계를 자라게 하는 중이다.

나는 무엇을 말해야할 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는 이미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지금, 이 순간.

나는

들풀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나 또한 그 흐름 안에서 살아내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주1> 윌리엄 블레이크, 블레이크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

주2>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한길사

주3> 루미, 루미시집, 시공사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연재]

월 5:00a.m. [짧은 깊이]

화 5:00a.m. [엄마의 유산]

수 5:00a.m. [필사 - 사유의 손끝에 철학을 품다]

목 5:00a.m. [영혼의 노래]

금 5:00a.m. [나는 시골이 좋습니다.]

토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일 5:00a.m. [영혼의 노래]

#시골살이 #중년의삶 #전원생활

금요일 연재
이전 15화첫 출품, 시와 수필 동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