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내게 준 하루는
태양이 뜨던 지던 24시간.
나 스스로 내게 준 하루는
태양이 뜨기 2시간 전부터
태양이 지고 2시간 후까지다.
여름과 겨울의 차이는 있겠지만
얼추 일어나 책상에 앉으면
겨울에는 3시간 정도,
여름에는 1시간 30분 정도가 지나면 날이 밝아진다.
벌써 수년째 나는 태양을 마중나가고 태양을 배웅하며
최소 10시간, 최대 15시간
'하루'에 나를 쓴다.
창을 앞에 두고 글을 쓰다가
머리가 먹통이 되면 그냥 마당으로 뛰어 나가 잠깐 서성인다.
그러다 다시 들어와 예전에 써놓은 글을 들추고
당시의 내 수준을 얕보며 뿌듯함으로 글을 고친다.
그리고 마당으로 나가기 전, 쓰다 만 글을 다시 펼치면
뿌듯함은 어디로 내빼고
난감한 나만 남는다.
육체노동을 하라는 소로우의 일기를 본 그 날부터
최소 하루에 1시간 정도는
말 그대로 몸을 쓰는 노동을 한다.
요즘엔 비탈에 마구 버려둔 나무를 겨울을 대비해 장작으로 쟁여두려 모으고 있다. 이렇게 매일 수개월을 모으면 겨울에 난방비를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난방비로 계산하면 하루 일당은 1만원정도? 그래도 좋다.
가는 가지들은 손으로 툭,
조금 굵은 가지는 발로 팍,
내 팔뚝보다 두꺼운 나무는 톱으로 슥 자른다.
그렇게 장작을 쌓아가는 것이 지금 나의 유일한 노동이지만
신체와 정신이 서로 견제하지 않고
제대로 손잡고 나를 사용하는 동안
온 몸은 땀으로 서서히 젖어가고
머리의 쓸모없는 것들은 서서히 비워지고
기분은 미세한 지점에서 뿌듯해진다.
글이 풀리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게 어렵다기보다
사유의 흐름이 막힐 때,
논리의 매듭이 엉킬 때,
그럴 때, 신체를 움직이면
온 몸통이 죄다 흔들려서인지
땀이 뽑아지며 몸 속이 정화되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막혔던 정신이 사이다를 들이킨 듯 뚫리고
구겨졌던 정신은 다림질한 듯 주름이 다시 잡히는 느낌이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 노곤한 시간이 되면
동네를 한바퀴 걷는다.
이 시간, 두 다리로 걷는 생명체는 나밖에 없다.
50여가구가 사는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도대체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러다가 펼쳐진 논과 밭으로 시야를 펼치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생명을 다한 작물들의 시체가 널렸었는데
오늘은 다 치워지고 없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흙이 정돈되어 있고
또 그 다음 날에는 그 넓은 밭에 비료가 뿌려져 있다.
도대체 이 일은 누가 언제 한 것이지?
아마도 이 마을에는
태양이 뜨고 지고와 상관없이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자신의 하루를
'성실'과 '근면', 두 단어로만 채우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그리고 내가 글에 막혀 머리를 뚫으려 나온 이 시간에 그들은
아마도 하루의 모든 노동을 마치고 어딘가에서 자신의 하루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어리석었던 시절,
나는 나의 하루를 대단하게 여겼다.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새벽 첫차로 출근해 막차로 돌아오는 사람들,
밤을 낮처럼 연구에 몰두하는 연구자들,
밤인지, 배가 고픈지도 모른 채 자기 세계를 여행하는 예술가들.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질문하며 한 자리에서 이틀을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금 내가 쏟아붓는 하루 10여시간의 책상앞 생활은 그들에 비하면 결코 '열심히'가 아니다.
그렇지만,
삶의 리듬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소로우는 글쓰기와 자연에서의 노동을,
니체는 글쓰기와 긴 산책을,
몽테뉴는 글쓰기와 사유, 독서로 삶의 리듬을 만들었다.
나도 지금 글과 책, 노동, 산책 사이를 오가며
물릴 것은 물리고
들일 것은 들이고
조일 것은 조이며
조금씩 리듬을 만들고 있다.
글은
책상앞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삶을 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삶이 글을 밀어내고 있다.
머리가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다리가 활자를 생산하고
두 손이 활자를 조립하고 있다.
쓸 글이 있어 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손이 내 삶을 종이 위에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장작을 패고
마을길을 걷고
논과 밭을 바라보는 사이
나를 거쳐 태어날 문장들이
조용히 내게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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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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