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한 세계

by 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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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보고

하나를 만지고

한 걸음을 걷고.


하나마다

하나의 세상이 열린다.


내가 보는 모든 장면 중 하찮은 것은 없다.

장면 하나는 세계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매일 펼쳐진 세계 속에서

나는 세계의 중심이 된다.


낮엔 영상,

밤엔 영하.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며

땅은 계속 울퉁불퉁하다.


새벽독서를 마치고 날이 밝으면 마당에 나간다.

하얀 서리가 채 녹기 전이어서

한 걸음만 내디뎌도 땅이 딱딱하게 밟힌다.


눈앞에 드라마틱한 장면이 펼쳐지지는 않지만

지금 보이는 장면,

느껴지는 발밑의 감각만으로도

땅은 밤새 담은 찬기운을 얼마나 거칠게

풀고 있는지 느껴진다.

KakaoTalk_20260311_182013613_05.jpg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 울퉁불퉁해진 땅


거친 숨을 토해내며

땅은,

또 작약의 싹을 올렸다.


처음엔 낯설어서 이상했던

손톱만한 빨갛고 딱딱하고 뾰족한 새싹.


푸른 싹들 사이 혼자 빨갛다.

유들거리는 싹들 사이 혼자 딱딱하다.

보들거리는 싹들 사이 혼자만 뾰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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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톱만한 빨간 송곳같은 작약싹이 올라왔다.


꽃에도 무식했던 나였다.

늘 화려한 꽃만 봤지 흙에서 싹이, 싹에서 줄기가,

그렇게 한 생의 모든 계절을 본 건 시골에 와 처음이었다.

그래서 작년 봄,

땅에서 솟구친 빨간 송곳을 독초인줄 알고 뽑으려다 하도 신기해 지켜보기로 했는데,

5월의 어느 1주일,

그토록 화려한 작약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요 며칠 이렇게 작고 빨간 송곳이

너무나 반가운 것은 화려함때문이 아니라

지난 1년간 이들이 보여준 '사는 모습'때문이었다.

1주일이 되기 전까지, 모든 시간을 피우느라,

1주일 후에는 다시 지켜내느라 녹아내린 얘들이다.


녀석이...

이 빨간 녀석이...

다시 올라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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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마당 한 가운데 저렇게 이쁘게 활짝 핀 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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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걸음 속,

흙은

빨간 송곳과 함께

세상이 던져야 할 질문들도 함께 올렸다.

해답을 찾으라고 내게 내미는 듯,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난 질문을 받는다.


내가 오늘 보낸 1분은 어느 길을 향했는지,

내가 오늘 디딘 한 걸음은 제대로 걸었는지,

나는 무엇을 밀어내고 무엇을 뽑아버리고 있는지.


땅은 숨김없이 그저 드러낸다.

보여 주는데 보지 못하는 것도 나,

숨기기 않는데 숨기는 것도 나다.


흙을 조금만 열어도 땅이 숨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이 주는 기운 그대로를 받아

크게크게 호흡하며 배를 부풀리는 모습을

나는 한참 서서 바라본다.


한 걸음 내디딘 작은 보폭에

십수개 솟은 새 생명.


한 걸음은 하나의 세계다.

한 걸음 안에 십수개의 생이 숨쉰다.


마당은 늘 조용하지만

생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바지런히 자기 생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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