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거진 [익숙한 명제의 재해석]은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관념에 대해 지담이 '이건 아닐걸?' 의문과
반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저 저의 사고수준이 여기까지인지라 너그러이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는 아주 조심성없게,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위로해 드릴께요'라고 말한다.
아...
이 위로란 것이.. 위안이라는 것이...
보여지는 얼굴에 비해 얼마나 경솔한 악마의 속내를 지녔는지
잠깐 들여다보면 어떨까?
'위안을 받을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마리 레누르가 용기있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라고 릴케가 얘기했다.
위로와 위안.
누군가가 아파할 때, 괴로워할 때, 슬퍼할 때 우리는 위로를 하게 되고
내가 그런 처지에 서 있을 때 위로를 구한다.
하지만 인간의 행복이란 것이 단지 즐거움, 반가움, 신나는 일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오열하고 투쟁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들도 모두 함께 뒤섞여 얻는 그 선물같은 쾌감이 행복인 것이다.
위로를 구한다는 것은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경솔한 판단을,
나는 부정이라는 녀석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매기지 않겠다는 무모한, 또는 무지한 상태까지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일면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이런 관점에서
위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위로'를 자처하는 이들은
상대의 인생에서 지금의 부정상태가 어떤 이유로 필요했는지 알 길 없는데도 불구하고,
반드시 필요해서 등장한 그 감정상태를
위로함으로써 희석시키고 나아가 없애버리는 죄를 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부정적인 정서들도 다 이유가 있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보다 큰 시선으로 인간을 대한다면
어떤 슬픔에도 동정하기보다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입조심, 행동조심하는 것이 더 상대를 위하는 것이 아닐까?
그 근육이 필요한 미래가 상대에게로 걸어오고 있으니 근육을 키우기 위한 활동이 필요한 것일텐데
상대의 미래에, 진정한 사랑을 보탤 수는 없을까?
위로하는 자신의 자비스러워보이는 태도가
상대를 유약하게 만들어 미래에 큰 불행에 무너지게 한다면 그것이 과연 자비인가, 자비로 포장된 저주인가?
그렇다고 해서 위로와 위안이 불필요한, 무가치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 자선으로 위장한 위로와 위안은 오히려 상대에게, 마리 레누르가 한 말처럼 저주를 보태주는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하는 것이다.
값싼 위로, 조언, 충고는 해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제대로 사고가 갖춰지지 않은 이의 조언이나 충고는 더 크게 저해가 된다.
위로해드릴께요.
도와드릴께요.
조언하나 할께요.
라는 평범함 속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자각하더라도
우리는 더 상대에게 진정어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로, 조언, 충고...
모두 딱 필요한 그 자리에서 정말 유용한 행위이다.
하지만
딱 필요한 그 자리가 아니라면 항상 이면의 부지런한 악마가 먼저 혀를 낼름거리고 있을테니
'위로해주는 착한 사람' 포기하고
스스로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위로가 갈급한 그 일이 네게 어떤 일을 하러 온 것이라고...
오히려 인상을 쓰더라도 상대에게 진심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위로와 위안에 대한 지담의 낭독영상, 그리고 글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