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라보는 15개의 시선 13
삶을 바라보는 15개의 시선 14
한번도 도박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내기.같은 것도 나에겐 낯설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잘하는 것도 없고 그러니 내기같은 걸 할 기회도 없고 별로 아는 이도 없기에 나랑 내기하자 말할 상대도 없다.
하지만 알았다. 나야말로 대단한 도박꾼이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도박'이라는 명제 앞에서 도박꾼처럼 살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 사실을 방금 전, 아주 찰나에 깨닫고는 아! 감탄과 한탄이 섞인 탄식의 기체가 내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나는 '인생'이라는 도박장에서 도박꾼이 되어야만 한다.
음.. 나는 도박꾼의 기질이 약간 있는 것도 같다.
한번도 안정.에 머무른 적이 없다.
나라는 사람의 천성이 그런가보다 했고
나라는 사람은 원래가 도전하길 즐긴다 여겼고
나라는 사람은 뭐든 초반에 엄청난 스피드로 결과를 이끄는 능력이 있다 믿었고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하다가 싫을 때 뒤돌아서는 냉정과 냉철이 명철하다 판단했다.
그냥 나는 도박꾼스러운 패턴이 있다.
나는 남들이 어떻게 그리 쉽게 모든 것들을 해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 사람이긴 한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을 하지 못한다. '쉽게?' 아니, 쉬워보이나보지. 난 쉽지 않은데. 이리 말하려 하나 이리 전하면 왠지 건방져보일 듯해서 그저 그리 말해주니 고맙다 하고 만다. 쉬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 어려웠다.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안해본 일들이라 쉬울 리가 없다.
나는 한글을 배울 때도, 알파벳과 원소기호를 외울 때도 참 어려웠었고
처음 강의를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책을 읽는 지금도 나는 어렵다.
아주아주 어렵다.
어려운 것에 익숙해져서 쉬워보이나보지.
내가 나를 도박꾼이라 여기는 것은 단순한 이유때문이다.
도박(賭博),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不可能)하거나 위험(危險)한 일에 손을 대는 것.
미래는 알 수 없다. 가능인지 불가능인지, 위험한지 안전한지 알 수 없다.
지금껏 경험한 과거는 가능했던 것만 안전하게 남아있는데 당연히 미래는 불투명하고 알 수 없으니,
안가본 길, 가능여부와 안전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운, 기회도 미래에만 있는 것이니 요행수를 바래야지.
이런 단순한 사전적 풀이만으로도 도전하고 꿈을 꾸는 나는 도박꾼이 되어야만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위험을 안전하게 현실에 착지시키기 위해 운을 바라는 도박꾼.
인생자체가 도박장이다.
누구나 미래로 걷고 있고
미래는 경험이 전무한 곳이고
경험이 전무한 곳은 내가 계획할 수 없으니 위험투성이이며
그래서 대단한 배포없이 과거에 저당잡힌 몸뚱아리로 이리기웃 거리기웃거리기만 하면
도박장에서 더 털리는 꼴을 면할 수가 없다.
배포.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배포다.
이성이 아니라 감각이다.
될 것 같다. 싶을 때 베팅하는 배포외에 뭐가 또 필요하리!
제대로 크게 배팅해야 한다.
꿈을 굳이 적게, 작게, 조용하게, 얌전히 꿀 필요가 없다.
판을 크게 키우자. 크게 배팅해보자.
원래 꿈이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 존재하기에 꿈인 것이다.
아무리 작은 꿈이라도 안해본 것이기에 도박꾼의 마음없이는 갈 수 없다.
꿈의 항구에 제대로 도박(到泊,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함)하기 위해 나는 도박(賭博)꾼이 되어야만 하겠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했던 것을 더 하려 하고
결과를 더 나은 쪽으로 연결시키려 하고
그 연결을 통해 과거의 모든 것까지 소환하여 이어붙이려 하니
내 지력과 능력과 담력은 자연스레 쌍으로 덩어리지어 나를 더 큰(클까? 이건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세계로 자꾸만 밀어붙인다.
도박을 해보진 않았지만 영화 속에서 본 바로는 동네에서 짤짤이 좀 하는 놈이 마을의 고스톱판에 들어서고 서울로 상경, 포커판으로 진입해서 필리핀의 카지노로 들어가더라.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맛을 본 놈이 더 자극적인 맛을 찾게 되고 자극은 더 센 자극을 또 견인한다.
물론, 인생도박이란 것은 선(善)을 향한 꿈의 도박이어야만 한다는 전제하에.
20대에 시작한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일에서부터
지금 여기 이자리, 이 시간을 지키는 나의 모습에까지 결코 안정이란 찾을 수가 없다.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것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 여겼던지라 그 많고 대단했던 제안들은 다 거절했었다.
아깝기도 하지만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거절도 하고 포기도 하고 외면도 하고 회피도 하던 그 도박현장 덕에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이 모습으로 여기 서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느낀다.
아주 민감하고 섬세하게 감지한다.
이 촉을 나는 믿어야만 한다.
왜냐면, 나는 주관적인 해석을 상당히 경계하며 객관적인 합리에 나를 갖다 붙이기를 좋아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객관적 합리'라 불리는 그것 역시 활자나 말로 내게로 오는 순간 추상의 터널을 거쳐야만 하고 내 지성에 이미 존재했던 주관과 섞여 나에게로 인식되는 것인지라 나는 결코 객관적인,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미묘한 단계단계를 거쳐 내게 인식된 모든 판단들은 주관일수도 객관일수도, 합리일수도 비합리일수도 없다. 그저 나의 인식에 존재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 나의 판단일 뿐이다. 그것이 촉이고 감이고 직관이기에 나는 현재, 내가 서 있은 이 자리의 직관을 믿어야만 한다. 합리니 비합리니 이런 것을 따지는 에너지는 이제 불필요하다. 결코 어떤 쪽으로도 합일을 볼 수 없기에 이도저도 아닌 것이 아니라 이래도저래도 되는 쪽으로 나는 내 직관을 믿기로 한 것이다. 개인의 합리는 공리를 초월할 수 없고 공리는 신비를 초월할 수 없으며 신비는 나에게서 도출될 수 없으니 나는 이 느낌, 촉, 감, 직관을 믿고 이에 따라 내 모든 것을 걸어보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지성의 언저리에서 나는 깨찰한다. '깨찰한다'는 사전에 없는 단어다. 내가 만들었다. 찰나적으로 느껴진 깨달음을 영원히 고찰하는 인식으로 나에게 의식적으로 주입시키고 싶을 때, 깨달음이라는 단어자체가 주는 무게감에서 벗어나고 싶고, 단순한 느낌과는 차원을 달리 하고 싶고, 이것을 쉬이 잃고 싶지 않다는 정신의 욕망을 허락하면서, 그러면서도 내 깊은 곳에 정당하게 자리잡아주길 원할 때 사용하는 나만의 형용사이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지만, 여하튼.
나의 지성의 언저리에서 나는 깨찰한다. 나에게 온 미세한 감각, 즉 느낌, 촉, 감, 직관에 확신을 가질 때 나는 '신의 계획'에 내가 진입했음을 느낀다. 신이 자신이 설계한 무한한 세상에 내가 필요했음이라. 그가 나를 계획에 넣은 것이다. 신의 계획에 중요한 1인이 된 이 느낌. 이것을 표현할 언어는 내게 없다(또 만들어봐야겠다). 나의 합리를 외면하고 공리를 쫒아 가니 공리는 신비앞에 무릎꿇고 신비는 나를 초월한 어떤 '느낌'으로 나를 깨찰시켰다. 믿어져서 믿는 게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어서 믿는 것이다.
지금까지 합리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 제약을 하게 했는가?
지금까지 비합리라는 속박이 얼마나 많은 것을 거부하게 했는가?
지금까지 추구하던 공리가 얼마나 많은 기적같은 느낌에 의해 무너졌는가?
지금까지 수많은 기적들이 합리와 공리라는 한계때문에 얼마나 내게서 달아났는가?
아니, 무시와 외면을 당한 채 다른 인생으로 넘겨졌는가?
나는 신의 계획에 진입된 것을 느낀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 계속 알짱거릴테다. 알짱거리다가 또 어떤 낌새라도 낚아채게 되면 조금 더 다가가 더 큰 모션으로 알짱거릴테다. 더 큰 망치로 못질할 것이고 한번 더 삽으로 땅을 파낼 것이며 일부러 눈 질끈감은 채 열심히 하는 척 나는 알짱거릴테다. 알짱거리다가 신이 회초리를 들라치면 맞거나 어디 짱박혀 잠복하거나. 암튼 나는 신앞에서만은 나의 모든 비굴과 영악들까지도 동원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계획에 날 넣어주었으니 나의 모든 것들을 다 포용해주시겠지.
'인생은 도박'이라는 말은 옳다. 가보지 않은 미래를 향해 매번 계획이라는 함정에 속아 그렇게 전진했었다. 가보니 이 판은 작은 판이었고 가보니 거기선 놀고 싶지 않았다. 가보니 알게 된 사실들을 합리라는 바구니에 넣어 또 다른 판으로 가봤지만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노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기가 얼마나 재밌고 고급진줄 아냐고. 여기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라고. 안다. 그런데 재미가 없다. 그래서 또 떠난다. 내 합리의 바구니는 더 무거워지고 견고해졌다. 그 합리를 믿고 다른 판으로 들어가지만 이내 마찬가지다.
합리는 더 단단해졌지만 어느 순간 무너졌다.
무엇때문에?
'느낌'때문에.
합리는 비합리와 만나 또 다른 합리를 도출하는 변증과 복리가 결국 '초월된 합리'다.
이 합리를 '느낌'이라 부르기로 했다.
거창하게 '직관'이라는 표현을 쓰기보다 그저 느낌이라는 가벼운 표현이 좋다.
내가 느끼지만 내가 창조한 게 아니다.
무언가로부터 느껴지는 것이기에 내 안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온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 느낌. 느낌을 믿기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믿어져서 믿는 게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어서 믿는 것이다. 믿어야만 유리하기에 믿는 것이며 가보지 않은 미래를 의심하며 가는 것보다 낫기에 믿는 것이지 믿어져서 믿는 것이 아니다. 사실, 미래를 어떻게 자신하며 확신하며 맹신하며 가겠는가? 경험이 없는데. 믿을래, 안 믿을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믿지 않고 가는 것보다 믿고 가는 것이 유리하니까 믿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을 다 걸어보련다.
능력을, 실력을, 정력을, 담력을 걸어봤었고 이제 꽤 당당해졌고 강해졌고 무모해졌다.
그렇다.
나는 무모해졌다.
무모하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자세다. 무언가를 하려 하는데, 즉, 안가본 길을 가려는데 무모함말고 뭐가 필요한가? 계획? 글쎄. 계획은 과거로부터 연계된 것이기에 굳이 지금 내가 머리로 짜내지 않아도 내 세포 곳곳에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차피 연결연결되어 있을텐데 굳이 그것에 내 머리를 내어줄 필요가 있을까? 무모하면 된다. 기회와 운은 과거에 없다. 미래에 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진부한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진부한데 진리다. 도전자체는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컴컴한 어둠속을 더듬거리며 보물을 찾아야 하는. 미래는 그렇게 암흑이며 내가 원하는 꿈은 암흑속에 존재하는 빛이다. 무모한 것이 기본이자 기준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차게 무모할 수 있는 이유는 '빛'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이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논리야말로 진짜 논리다. 합리다. 이성이다.
신의 계획에 진입한 지금.
믿고 가는 것.
결과로서 과정을 입증하는 것.
미래를 정하고 오늘을 사는 것.
충분히 당연히 무모해야만 하는 자여,
인생은 도박장이다.
이미 경험은 충분하니 이제 배팅하라.
도박꾼의 자세로 인생의 마지막을 통크게 배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