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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25. 2023

인식은 신(神) 밖에
의식은 신(神) 속에

'인식'과 '의식'에 대한 소고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바란다.

바란다는 자체가 현실에는 없다는 전제를 지닌다.

현실에 없지만 미래에는 존재하길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기도한다.

'이러이러하게 해주세요.'라고.

하지만,

이 기도가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기도의 언어를 바꿔본다.

'이러이러한 것을 주심에 감사합니다.'라고.


이 차이는 아주 간단하다.

없으니 갖게 해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이미 갖게 해 주셨으니 잘 쓰겠다는 감사다.

현실에 없으니 미래에 있게 해달라는 현실중심이 아니라 이미 가졌으니 먼저 감사하겠다는 미래중심이다.

가지고 싶다는 보상중심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결과에 따라 오늘을 살겠다는 댓가중심이다.

지금 없으니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나의 인식, 관념속의 언어가 아니라 

이미 가진 결과를 믿고 과정을 살겠다는 인식 밖, 의식속의 언어인 것이다.


현실은 나의 과거가 만들어놓은 관념, 즉, 인식의 실체다.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미래에 창조해야(창조되어야) 할 것인데 

우리는 현실의 인식으로 미래를 그리니 허상으로서만 떠돌뿐 실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초점이 현실에서 미래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식 밖에 존재하는 나의 의식 세계는 현실을 초월한 미래, 

나아가 과거부터 미래까지 전체를 담고 있는 나의 주체다. 

나의 주체인 의식에 의해 현실을 바라보며 나에게 창조를 명령하는 것이 미래를 실체화시키는 관점이다. 

즉, 초점이 미래에 있는 것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이 창조된다.

결코 작은 것에서 큰 것이 탄생될 수가 없다. 

사물도, 사태도, 모든 삶이 그렇다.

크게 이룬 사람은 크게 꿈꾸고 멀리 내다보고 크게 벌이고 큰 문제와 직면하면서 더 크게 나아간다.

나에게 발생한 모든 사태는 내가 사태보다 작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기에 

나를 사태보다 더 크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세상이 움직이는 작동원리는 큰 것에서 작은 것을 탄생시킨다.


의식이 인식보다 당연히 크다. 광활하다. 창대하다.

의식은 자지도 않고 늘 깨어 있으며 나의 정신과 신체, 영혼을 주관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유레카를 외치게 하는 것도 깨어있는 의식때문이다. 

하지만 인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내가 사고하고 행동하며 만들어놓은 생각덩어리다.

경험적 한계와 내가 가진 지성의 한계,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라는 시간의 한계로 만들어진 덩어리.

심지어, 고착된 관념까지 인식의 범주에 있으니 인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그런 존재다.


데카르트 

'그 어떤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이 신(神)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 밖에는 모두 신 속에 있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심이라든가, 마음의 동요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 밖의 이와 같은 것은 나 자신이 피하고 싶어 했으므로 

신 속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라고 했다.


인식은 나의 감정과 지성과 신체와 연관되며

의식은 나의 영혼과 결탁하여 나의 정신에 명령하며 감정과 지성과 신체를 주관하는,

내 삶의, 내 자아의 주체이다.

따라서,

인식은 신의 밖에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나이며

의식은 신의 속에 존재하는 총체로서의 나이다.


의식이 인식을 이겨야 한다.

인식을 창고에 가두고 의식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인식을 깨고 의식을 깊이깊이 넓게넓게 키워내야 한다.

인식의 창고는 아는 세계이니 편하고 쉽지만 의식의 문을 여는 순간 환한 빛만 존재할 뿐 나는 두렵다.

하지만

인식의 창고로 들어가면 나는 과거의 나를 만날 것이고

의식의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원하는 내가, 되어야만 하는 내가, 바라던 나를 만날 것이다.

인식의 창고에 들어서면 닫힌, 한정된 속에서 살겠지만

의식의 문을 열면 무한의 열린 세상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인식의 창고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이 내 인식의 결과였으니 별다른 기대없이 연명하면 된다.

의식의 문을 열어도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미래는 내가 모르는 것이니 신(神) 속에서 이끄는대로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인식의 창고에서는 연명하는 괴로움이,

의식의 문을 나서면 연마의 고통이 날 힘들게 하겠지만 

이 고통은 창고에 갇혀 평생을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쾌락의 길로 나를 안내하리라.


그리하여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인식 속에 갇히기보다

내가 모르는 길을 갖고 있고 알고 있는 의식의 문을 나서는 방향으로 한걸음 걸어야만 하겠다.

우선 인식을 창고에 가둬야겠다.

아주 강한 자물쇠로 잠근 후 열쇠는 버려야겠다. 

게으르고 불안한 내가 언제라도 촐싹맞게 그 자물쇠를 열어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는

두려워 닫아두었던 의식의 문을 열어야겠다.

그리고 모두 창고에 가두고 열쇠마저 버린 맨몸이지만 한발짝씩 다시 걸음마를 떼어야만 하겠다.

 

이제 두 손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내 안을 가득 채운 '믿음'하나로

내 감각을 온통 자극하는 '느낌'만으로

내 지성을 모두 비우고 '가치'를 채운 후

내 지금까지를 모두를 외면하고 '미래'의 나를 만나러

나는 그렇게 나의 자아로서의 주체인 '의식'이 이끄는 대로 걸음마를 해야만 하겠다....


그렇게 나는 

나를 창조해낸 신(神)의 치마폭에서 

안전하게 주체적인 나로서 살아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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