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키웁니다. - 행동리셋 10
나의 마인드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지난 4년여, 나에겐 엄청난 조교이자 선생이자 훈육관이자 감독이자 코치이자 아무튼, 이름만 떠올려도 무시무시한 존재가 늘 나를 따라다니며 내가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를 감시했다. 네메시스(Nemesis)다.
그녀는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여 그리워하다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에게 벌을 내린 장본인으로 율법(律法)과 절도(節度), 복수(復讐)를 관장하며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이다. 그녀는 여기저기 간섭하지 않는 곳이 없다. 특히, 부의 신 플루투스를 예의주시하는데, 플루투스는 운명의 여신 티케를 따라다니며 부를 여기저기 마구마구 뿌리고 다닌다. 티케와 플루투스는 둘 다 장님이기 때문에 누가 선하고 착한지, 누가 부를 얻을 자격이 되는지 안되는지도 모른 채 마구 퍼주는 것이다. 하지만, 절도와 율법을 엄밀히 따져 냉정하게 응징하는 네메시스한테 딱 걸리면 받은 부도 도로 토해내야 하고 또 잘못 분배된 부는 그녀가 냉정하게 다시 분배하여, 부당한 자를 억울하게 내몰지는 않는다. 결국, 뿌린 대로 거두게 하는 여신이다.
이러한 그녀이기에 나는 그녀를 나의 판관으로 곁에 두기로 했다. 내가 정당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임했으면 나에게 부를 달라. 정신과 신체, 영혼과 정서, 관계와 경제 모든 면에서 나에게 응당한 보상을 달라는 의미다. 지금까지 읽은 대다수의 책에서 신의 계산은 오차없이 아주 치밀하다고 했으니 이를 관장하는 수장인 그녀를 곁에 두고 나의 하루하루의 손익계산을 담당하게 한다면 내 인생은 치러야 할 계산 제대로 치르고 받아야 할 보상 역시 신들의 계산법인 복리로 받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해야 하는데 잔꾀부리면 마이너스(-), 안해도 되는데 한번 더 하면 플러스(+), 내 머리 속에 요런 식의 계산이 하나씩 생기면서 ’참, 하루 재밌네!‘ 싶고 조금 복잡한, 그러니까 이유없는 부당이나 억울, 난제에 봉착하면 과거의 잘못이나 오류 등으로 인한 대가를 이제 치르는 것이니 '잘됐네!' 싶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고 반대로 영문모른 채 횡재가 일어나면 내 기억엔 없지만 과거의 대가로 인한 보상인가, 아니면 지금 받고 나중에 뭔가로 치러야 하는 계산서인가? 싶어 궁금해지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0으로 만들어가며 나는 나를 장난감삼아 놀고 있다. 네메시스가 곁에서 냉정하게 감시하며 판단해주니 나는 그저 내 하루를 충실히 제대로의 방향으로 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나같이 감정에 약하고 굳이 지켜야 할 율법도 없고 종교적인 신념이 강하지도 않고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도 아닌 평범한 자는 아무리 엄격한 스스로의 기준을 세운다 하더라도 나 몰라라 하거나 스스로를 속이며 나 하나쯤이야 하며 살아도 이 세상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지 모른다. 아무도 관여하지 않을 테니 나만 눈감고 그저 대충대충 하루를 보내도 누구 하나 탓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나는 나를 지독하게 변화시키려 하는 것이냐? 이에 대해 나 스스로에게도, 하늘에 대고도 많이 물었는데 결론적으로 ’나는 모른다‘이다. 아니,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이다. 나를 피조물삼은 어떤 존재가 나를 만들 때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저 채송화씨앗은 채송화가 되도록, 장미씨앗은 장미꽃이 되도록 만든 것처럼 나는 '김주원'이 되도록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라 나는 모른다. 그저 꽃은 꽃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이유이듯 나 역시 '김주원'이 되는 것이 유일한 이유라면 이유겠지.
홍시가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이고 장미가 장미향이 나니 장미인 것이다. 홍시에서 홍시맛을 없앨 수 없고 장미에서 장미향을 뽑아낼 수 없듯 나에게서 나의 존재이유를 드러낼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안주하고자 하는 의지보다 더 큰 의지에 의해 변화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홍시가 비바람에 견디어 맛을 담는 것이나 장미가 온갖 병충해와 싸워가며 향기를 생성해 머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변화가 어디로 가기 위한 진통인지에 대한 답은 내가 아니라 날 만든 존재만이 알고 있다. 나는 매개자일 뿐이니까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된 후 가뿐해졌다. 내가 찾을 수 없는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주제넘는 짓이므로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단, 날 피조물삼은 존재가 날 더 이뻐해주고 사랑해주어 튼실한 열매로 맺어주길 간절히 바랄 뿐. 나는 그저 하루하루 ‘내가 내가 되도록’ 잘 키워가면 된다. 결과와 증명은 나의 몫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나약한 내가 네메시스의 판단에라도 의지하여 나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내 둔감한 두 눈이 내 인생의 전체를 보게 하는 기준이 되고
내 두려운 심장이 가보지 않은 미래로 다리를 옮기게 하는 동력이 되고
내 아둔한 머리가 커다란 존재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도록 영혼을 맑게 해주는 해독제가 된다.
가야 할 곳을 먼저 가고, 가고 싶은 곳은 나중에
먹어야 할 것을 먼저 먹고, 먹고 싶은 것은 나중에
봐야할 곳을 먼저 보고, 보고 싶은 곳은 나중에
해야할 말을 먼저 하고, 하고 싶은 말은 나중에
들어야 할 말을 먼저 듣고, 듣고 싶은 말은 나중에
읽어야 할 책을 먼저 읽고, 읽고 싶은 책은 나중에
잡아야 할 것을 먼저 잡고, 잡고 싶은 것은 나중에
배워야 할 것을 먼저 배우고, 배우고 싶은 것은 나중에
써야할 것을 먼저 쓰고, 쓰고 싶은 것은 나중에
줘야 할 것을 먼저 주고, 주고 싶은 것은 나중에
이해할 것을 먼저 이해하고, 이해시키고 싶은 것은 나중에
한마디로,
해야 할 것을 먼저 하고, 하고 싶은 것은 나중에
이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다. 일단 대가를 치르는 것부터 하는 것이 기준이다. 전자인 대가를 치르면 마구 뿌려준 플루투스의 부와 행운이 정당한 것이 되지만 후자인 보상을 먼저 받으면 플루투스가 아무리 많은 부와 행운을 뿌리더라도 네메시스에게 딱 걸려 빼앗긴다. 나는 이러한 기준으로 ‘변화’를 이끈다. 마인드와 행동의 변화를 위한 루틴은 나에게 무조건 전자이다. 가야할, 먹어야 할, 봐야할,..... 즉,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는 의무먼저, 권리나중에 익숙해져 있다고 하겠다. 이유는, 이제 나의 ‘의지’가 소용없어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억지로, 의지를 짜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의지가 나의 의지를 이겨내어 그저 나는 이끌려가는 느낌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나도 그렇다.
나의 존재자체를 믿는다면 나에게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이미 나에게 존재하는 충분한 자원으로 나의 길을 두려움없이 갈 수 있다.
돌틈 사이를 뚫고 나온 여리디여린 풀잎을 한참 들여다보며 나는 그 강인한 생명력에 넋을 잃은 적이 있다. 내 손가락 두개만으로도 꺾어버릴 수 있는 이 작고 여린 존재가 단단한 바위를 뚫고 나왔다. 순간 풀잎은 거대한 우주였고 자연의 교과서였고 나에겐 스승이었다. 풀잎보다 수백배나 커다란 내가 나의 존재를 거부하고 자연의 힘을 의심하며 내 속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것은 절대적인 죄악임을 그 순간 깨달았다. 이로써 나는 거대한 의지에 나의 의지를 굽히고 자연에 의지하여 내 안의 자원을 허투루 활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결국,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로부터 보호받는 느낌, 결코 보호받는 자는 상처받지 않아 고달프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 자연스레 그 길을 걸어 그 곳에 도착할 것같은 느낌. 그저 느낌이지만 이 느낌은 믿음으로, 확신으로, 나를 걷게 하고 있다.
혹시 느껴봤는가?
어떠한 보호와 관심의 대상이 되어 평안해진 그 느낌을....
인생이란 게 별 게 없다. 그저 내 한 몸 아프지 않고 내 가족, 자식들이 무탈하고 원하는 바대로 잘 살면 되는 것. 이들에게 작든 크든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존재를 올곧게 걷게 함으로써 이들이 내 걱정을, 나 또한 이들 걱정을 하지 않고 안심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일을 한 것이라 여긴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나 역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 말할 수 있는 가슴이 있으니 이러한 자가 보호받는 자가 아닐까.
그러니 이리 단순한 인생에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에, 나를 키우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 내가 세상을 구할 대단한 인물은 못되지만 나 하나 건사하고 내 가족에게 누가 되지 않고 원하는 것까지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보상을 이미 받고 있고 앞으로 계속 받는 방법까지 아는지라 인생이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래 표를 눈여겨 보라. 네메시스를 내 인생에 개입시키고 나는 일정부분에서 치밀해졌다. 변화를 위한 루틴을 실천하면서 100일간을 숫자로 표현해본 것이다. 단, 인간의 계산이 아닌 신의 계산인 복리를 이용해서. 네미시스 역시 신의 계산을 따르니까. 100일간 무언가를 꾸준히 했을 때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는, 상상도 못하는 숫자가 나온다. 루틴을 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하면 다시 1일로 돌아간다고 앞서 언급했었다. 숫자 역시 0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신의 계산을 머리 한 켠에 품고 산지는 꽤 됐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어마무시한 숫자의 일부는 자식들이 잘 되는 것으로, 또 일부는 부모님이 건강한 것으로, 또 일부는 내가 건강한 것으로, 내가 가난하지 않은 것으로, 내 일이 결과를 내는 것으로, 내게 좋은 사람이 오는 것으로, 내 주변의 모두가 잘 사는 것으로, 어떤 식으로든 수시로 나눠서 받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같이 생각없는 한랭이로 사는 이가 이처럼 안정되게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뜻을 품고 가슴이 설레이며 매일 그 길을 걷는데 두려움도 걷히고 있으니 어찌 매일이 감사이고 매일이 정성이며 매일이 축복이고 매일이 또 다른 매일을 위한 투자가 아닐 수 있겠는가?
네메시스 덕이다.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원망이 가득했을 인간이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왜 쟤만 보상을 받느냐, 나는 여기 서 있는데 왜 그는 저기까지 갔느냐 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중용이라, 에머슨이 보상의 법칙이라, 뤼디거달케가 운명의 법칙이라 일컬은 것들, 올더스헉슬리가 영혼의 철학에서 언급했던 나선의 인생의 법칙을 모른 채 그저 이 작은 땅덩어리, 치우친 교육으로 최고학벌까지 간 나를 믿어버리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나는 보호받지 못한 채 고생 좀 했을 것이다.
변한 것은 없다.
나는 나를 키워내는 것이 선(善)이라는 논증을 내 이성에 가미시켰을 뿐.
이 논리가 이치로 향해 곧게 세워지니 따르려는 것뿐.
이치를 따르는 삶이 가치있는 삶인 줄 알았으니 삶을 사랑하는 것뿐.
삶이 사랑스러우니 그 삶의 주체인 나도 사랑스러워지는 것뿐.
나를 사랑하니 주변도, 내 인생도 덩달아 귀하게 여겨지는 것뿐.
모든 것이 귀하니 나를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싶어졌을 뿐.
나를 더 귀하게 여기려니 내 모든 것을 더 잘 쓰이게 하고 싶어졌을 뿐.
잘 쓰이게 하려니 지금보다 나를 더 키워내야 하는 숙제가 남았을 뿐.
그렇게 나는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인생의 2가지 방식,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다시 리셋하고 싶었고 리셋하는 과정에 책이 항상 중심이 되어 주었으며 성현들의 말씀이 내 인생의 더 높은 기준이 되어 나를 그곳까지 데려가는 단순한 걸음을 지속적으로 걸었을 뿐.
나는 그렇게 나의 변화를 추동하는 신과 성현과 함께 4년을 살았을 뿐.
내가 나를 키워가는 단순한 변화야말로 진정한 선이 된다는 기가 막힌 단순성에 어렵던 모든 것이 쉬워졌고 복잡했던 많은 것들이 단순해졌으며 난처했던 많은 상황이 무관심하게 되어버려 이제는
나를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해지지 않은,
내 안의 소리가 밖의 소리 모두를 물리치는 커다란 아우성으로 들리는,
나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계라는 성현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가슴 깊이 느끼는,
자발적 고립에서 고독한 자아로서의 나와 이제 조금 친해지는 듯한,
그런 삶이 내게로 왔다.
지금까지 지난 4년여간 마인드와 행동을 바꾼 나의 이야기를 20개의 주제로 나눠 진솔하게 적어봤는데 나는 부끄럽고 민망하기도 하다. 우려되는 것은 혹여 내가 과하게 치장된 것은 아닐까, 또는 내가 어리석게 치부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사소한 감정조차도 아직 미세하게 나를 건드리는 것을 보니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나의 진정성있는 글이 혹 나처럼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을 키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특히 책과 사유를 통해 자신을 글로 써내려 가려는 이들에게 그 길을 가는 동반자가 여기 있소. 라며 손을 내미는 따뜻함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10편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나의 미래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것이다. 어떤 것들이 내 안에서 나올지 모르니 나 역시 내일 또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쏟아져나올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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