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Dec 18. 2023

나는 무뇌아(無腦我)
-멘탈드로잉-

이기론(利己論) -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본 글은 시리즈로 연재되기에 지난 글들에 이어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 지담드림


멘탈드로잉

정신과 행동, 의식, 감각. 감정.

이들이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좀 더 안정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제 감각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우선, 감각은 '기억의 근원'으로 전제한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감각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은 그저 누구나 비슷하게 지니고 있고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지만 감각의 정체를 아는 것은 나의 인생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아주 중요하다고 먼저 강조하겠다.     


이유는 감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며 감각만이 어떤 추론이나 견해, 이성의 개입없는 본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본유(本有)적 본능(本能)이 기준이 되어 거기서부터 감정, 인지, 추론, 사고, 행동, 지성이 이어져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대화를 '말'로 주고받으면서도 뭔가 소통이 되지 않는 느낌을 갖곤 한다. 그것은 각자 내뱉는 단어의 '선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의'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할 때 '정의'이라는 개념에 대한 인지에 상호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에 대한 더 쫀득한 대화를 위해서는 그 어떤 추론도 가미되지 않은, 또한 더 이상 수식어가 필요없는 그 지점에서 정의의 기본개념에 대해 서로 통일되게 인지한 상태에서 대화를 이어가면 대화의 공허함을 방지할 수 있다. 즉, 감각적으로 '뭔가 대화가 겉돌아'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간 자신을 지배하던 추론과 인지, 사고로 이어진 과정에서 본유의 본능에 변색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감각은 인간의 모든 생산활동의 가장 기초이자 기본이라 하겠다. 

    

물론 감각에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시각,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이 있지만 단순한 기본감각 외에 뭔가 느껴지는 또 다른 감각. 이것을 다수가 감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감정'은 '감각이 내재된 정서와 만난 상태(감각+정서)'이니 감각과 감정을 혼돈하지 않길 바란다.        

  

“지금 기분 어떠세요? 끝내주죠? 저하고 약속지켜줘서 고마워요. 그 한번의 경험만으로도 이렇게 뿌~~듯~~한 성취감? 뭐 그런 거 느껴지시죠?“    

계속 미소가 떠나지 않는 상대의 눈빛은 더욱 빛난다.


매일 코칭을 하는 나는

정말 이럴 때 미친다. 

너무 좋아서. 

너무 감동이라서. 

너무너무 커다란 보람이 느껴져서. 

이 글을 쓰는 아침에도 나는 2명을 코칭하며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눴다.    

     

감각이란 이러한 '느낌'이다. 성취감이라는 언어만으로도 표현이 부족한 어떤 느낌! 이 느낌을 한번이라도 느끼면 또 느끼고 싶어지고 그렇게 내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면서 나를 둘러싼 상황이, 현상이, 환경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감각, 즉 느낌에 의존하여 감정이 유발되고 

감정이 감동의 진동으로 이성에게 전달, 

이성에 의해 행동이 유발되고 

행동에 의해 상황이 바뀌는, 

이러한 감각부터 행동까지의 채색과정을 

나는 

'멘탈드로잉'이라 한다. 


기존에 어떤 색이 덧입혀져 있더라도 상관없다. 단 한번의 자극에 내가 한번 움직였을 뿐이지만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면 다른 컬러가 채색되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인 드로잉 작업이 내 감각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당연히 다른 컬러는 다른 감각으로 전해지기에 내 안을 채우고 있는 내부적 자아 역시 빠르게 반응하고 자아의 목소리도 더 크게 들리고 내 세포도 강한 진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각과 청각과 촉각. 모든 감각이 새로운 방향으로 진동하게 된다.       


감각은 이렇게 중요하다.

이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바꿔버리는,

그렇게 기존행동과 새로운 행동의 관계로 채색, 재해석되는 과정은

나를, 나를 둘러싼 모든 현상을 재탄생시킨다.


수개월을 웃을 일없이 무기력하게 지내던 분도, 글이 써지지 않아 자기 머리를 쥐어박으며 괴로워하던 이도 단 몇 번의 코칭을 통해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환한 미소를 보낸다. 본능적으로 얼굴 전체에 미소가 느껴지는 대로, 감각이 감정에게 전한대로 자신을 드러낸다. 낯선 경험을 통해 전해진 그 느낌! 성취감일수도 보람일수도 신기함일수도 여러가지로 표현되는 이 느낌. 


감각이 감정에 전해지고

감정(감정+정서)이 움직이며 감동(감정의 움직임)하고

감동의 진동으로 이성이 출동하여

이성은 미소지으라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소라는 신체움직임은 자신의 내면은 물론

주변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 기억은 나에게 더 자극적인 감각으로 또 다시 전해지며 

나의 잠재의식은 '우리 주인은 글을 쓸 때 미소짓는다'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이 기억은 강도에 따라 '내일도 또 해내야지!'라며 반복을 유도한다!!

이렇게 같은 행동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상황이 바뀌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되며 인생은 점점 더 커다란 나.선.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감각이 인식의 기저가 되고 인식이 행동을 유도하며 행동이 나의 인생을 만드니 결국 감각이 인간의, 우리의, 나의 주인이 되는 셈이다. 이에 대해 몽테뉴(주) 역시 '자기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치워두자!'라고 하면서 '사람에게 인식되는 모든 것은 확실히 인식하는 자의 소질에 좌우된다(중략) 모든 인식은 감각에 의해 우리에게 온다. 감각이 우리의 주인이다.’라고 했다. 


느낌으로 오는 감각을 외면하지 않는, 즉 이성을 잠시 미뤄두고 감각을 앞에 두는 인격은 '소질'이기에 수준이 매겨진다. 즉, 인식에는 소질이 있고 이 소질에 따라 인격의 수준이 다르다. 감각. 나에게 오는 느낌.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 동물과 식물은 감각으로 사는데 우리 인간은 감각을 무시한다. 생명이 흐르는 방향을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감각에도 정도가 있다. 

감격

격이 높은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는 것은 

의식의 확장(=기존인식의 차단)으로만 가능하다.  


한번 강렬하게 느낀 감각은 기억에 그대로 보관된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아주 자주 한다. 평소에 지나치던 길가의 꽃도 어느 순간 어떤 이유에서 아주 강렬하게 어떤 느낌으로 나를 사로잡았다면 앞으로 그 꽃을 볼 때마다 나는 그 느낌을 떠올릴 것이다. 너무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느낌 감정이 고스란히 기억에 저장되어 '뭐 먹고 싶어?'하면 그 음식의 이름과 레시피는 몰라도 그 때의 느낌만으로 그 음식이 먹고 싶어 침이 고인다.


감각은 이렇게 아주 강렬하게 기억에 저장되어 이성을 고정시킨다. 우울증과 같이 정서적인 증상을 앓고 있는 이들 역시 기억의 우선순위에서 감각이 극심한 불안과 우울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도 마찬가지다. 그 현상을 보면 그 때의 느낌때문에 이성이 마비되는, 노이로제도 마찬가지. 그 장면만 봐도 그 때의 그 느낌 때문에 행동에 제약을 받는. 감각은 아주 무섭게 나의 감정과 이성과 행동을 통제시키는, 내 몸의 주인으로서 강력한 권위를 누리며 기능한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대로 

감각의 기원은 기억이며 

기억은 감정과 이성에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 선택에 개입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실‘이라는 잣대로 감각을 바라보면 조금 언짢은 얘기를 할 수밖에 없겠다. 감각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개인적이기에 진실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이냐면, 앞서 언급한대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뭐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절대적으로 기억에 의존하여 답변을 하게 되는데 단지 '맛있었던 음식'만으로 등수를 매길 수가 없다. 누구랑, 언제,  어디서, 어떤 상태로 먹었는지에 따라 '맛'이라는 미각은 객관성을 떠나 개별적으로, 때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감각의 본질은 이성이 가미되지 않은, 

진심어린 본능적 느낌이지만 

결코 객관적이거나 구체화시킬 수 없고 

'기억'의 속성자체가 '과거'이기 때문에 

진심이지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감각의 '사실'여부를 따지는 것은 또 다른 관점이니 잠깐 제쳐두더라도 '감각'에 초점맞춰서 계속 얘기하자면, 우리는 기억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맛있는 것을 먹으면 지금껏 젤 맛있다고 여긴 그 김치찌개가 아래순위로 내려간다. 감격이 다운되는 것이다. 가장 예쁘다고 여겼던 그녀가 더 예쁜 어떤 여성에 의해 덜 이뻐지는 것이며 가장 신났던 놀이기구가 더 신나는 무엇으로 인해 신나지 않은 것으로 격하되는 것처럼 우리는 기억을 바꿀 수 있다.          


결국, 

내 기억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더 격상된 감각의 진입으로 가능하다

고 결론내릴 수 있다.      


새로운 감각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새로운 기억은 새로운 감정을,

새로운 감정은 새로운 이성의 잣대를,

이는 기존인식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하며

인식의 파괴는 의식의 확장을 유도하고

확장된 인식으로 나의 시야도, 관점도, 시선도, 모두 변화되며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고

행동의 변화는 상황의 변화를 이끈다.   

따라서,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면 새로운 감각을 주입하면 된다. 


새로운 감각의 주입은

새로운 짓, 안하던 짓을 하는 것이며

안 하던 짓을 한다는 것은

기존의 하던 짓을 안하거나

하던 짓을 다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미각을 비롯한 5가지의 감각을 초월한 감각으로 우리 기억의 우선순위가 매겨지고 그 기억들이 선취관념으로 형성되는데 새로운 자극, 즉, 안하던 행동이 주는 감각으로서 우리는 초월된 감각으로 나의 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고 확장된 의식은 우리의 정신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여 자신을 변화, 성장시키는 것이다. 



==> 다음 편, '영혼의 자극'은 다음 주 월요일(12/25) 발행됩니다. 


주>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2005, 동서문화사.


지담놀이터입니다. 매일 독서로 많은 이들과 함께 하는 놀이터, 

  삶과 사유, 사람이 함께 하는 곳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지담북살롱 : 네이버 카페 (naver.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