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Dec 23. 2023

나는 무뇌아(無腦我)
-영혼의 자극-

이기론(利己論) -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로 했다

본 글은 시리즈로 연재되기에 지난 글들에 이어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 지담드림


영혼의 자극

지난 글까지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초월된 감각'에 대해 잠깐 언급할까 한다.           


감각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민감하고 누구는 둔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테니 그만 거론하도록 하고 중요한 것은 인간은 감각은 둔하다고 우선 주장하려 한다. 


제 아무리 민감하고 예민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둔하다. 먼지가 늘 피부에 닿는데도 피부로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어? 다리에서 왜 피가 나지?' '어? 여기 왜 멍이 들었지?' 못 느낄 때도 많다. 비교자체가 모순인 줄은 안다만 동물의 감각과 비교하면 인간의 둔함은 감각상실 수준이다.     


탁란하는 새들이 비슷비슷한 모양과 색을 구분하고 알을 낳을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감각

똑같이 생긴 수천마리 무리들 속에서 정확히 자기 새끼를 찾아내는 펭귄의 감각

길도 없는데 수만km를 열 맞춰 자기가 목표한 그 지점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의 감각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바람타고 줄을 잇는 거미의 감각

저 높은 하늘에서 보이지도 않는 수풀 사이 작은 들쥐를 정확하게 낚아채는 매의 감각

접착제도 없이 작고 가는 가지만으로 높은 나무꼭대기에 바람에도 끄덕없는 둥지를 만들어내는 새들의 감각

그 작은 몸집으로 아파트 3층 높이까지나 집을 짓고야마는 흰개미의 감각

파종이 계절보다 늦으면 모든 양분으로 꽃을 얼른 피운 뒤 씨부터 땅에 떨구는 꽃들의 감각

그리고

우리집 고양이 김새나와 김개리가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파리를 순식간에 잡아버리는 고양이의 감각

         

말도 안 되는 줄 알지만 감각만큼은 인간이 둔하다. 거미의 몇 백배나 더 면적넓은 나지만 여기서 저기로 거미줄을 연결하기 위해 타는 바람을 나는 느끼지 못하고 멋지게 V자를 그리며 나침반없이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기러기보다 나는 방향감각이 없다. 코끼리는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간다는데 나는 네비게이션없이는 아무데도 못간다. 여하튼 인간은 어떤 동물과 비교하더라도 동물가운데 일단 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둔한 감각을 깨우치기 위해 배우는 이유는 영적진화(주1)를 위함이며 

따라서 인간이 더욱 인간다우려면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기에 

감각의 중요성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반박할 근거가 내겐 없다. 그저 사물의 본성을 다룬 루크레티우스나 이성적 탐구를 중요시 언급한 데카르트, 초절주의의 대가 에머슨과 그가 추앙한 스웨덴보그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 너무나 논리적으로 증명했으며 수천년전부터 내려온 이 전제와 증명에 대해 나의 지성이 반박할 그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는 이들이 알려준 바를 믿고 따를 뿐이다.  


감각은 인간이 지각하는 것의 시작이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주2)의 논증을 잠깐 언급하자면, 

그는 '이성(추론, 로고스)도 감각을 반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모두 감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반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중략)

감각은 느끼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동종(同種)끼리의 감각에서도, 

자극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이종(異種)끼리의 감각에서도 

유일하고 주체적이고 결코 서로 같을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현상에서도 서로 다른 이성의 작용(사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성의 시작이 이렇게 모두가 다 다른 감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지각의 시작은 감각에서부터'이며 '내 정신의 주체, 나라는 인간의 운용주체가 감각’이라 한들 논리의 비약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육체의 주인인 감각을 따르기 위해서는 영혼과 민감하게 소통해야만 한다. 왜냐면 육체는 신체+정신+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고 양자 물리학자인 울프(Fred Wolf) 박사에 따르면 ‘영혼은 0.0001%만 육신 속에 있고 나머지 99.9999%는 육신 밖의 우주에 퍼져 있다(주3)'고 했는데 우주는 '진리'라는 거대한 이치의 힘을 활용해 이로운 방향으로 세상을 움직이며 따라서 영혼은 결코 우리를 해로운 방향으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사악한 영혼들이 등장하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영혼은 우주가 균형을 잡기 위해 일정한 양만큼 등장시킨 것들로 인정해 버리기로 하고 이에 대해서는 저 높은 분의 설계에 따른 것이기에 내 소관이 아니니 거론을 삼가는 게 옳다고 여긴다. 나는 그저 사악한 영혼을 만나면 피하거나, 저러면 안되겠다를 배울 뿐.


내가 태어난 본성대로 살아가게, 

나의 길을 알려주는 유일한 메신저는 나의 영혼이다. 

지속적으로 신호를 주는 영혼을 무시하고서는 내가 나의 삶의 길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이 신호를 나는 

'영혼의 자극'

이라 부른다. 


'섬광’처럼 느껴지는 ‘자극'에 

나는 내 삶을 몽땅 의지시킨다.   

       

잠깐 생각해보라. 

앞서 얘기한대로 우리는 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혼은 나에게 계속적으로 신호를 주는데 나의 답답한 인식이 이를 지속적으로 막고 방해하다가도 어느 순간 '심장이 쿵', '머리가 번뜩'하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둔한 나에게 얼마나 간절하면 그토록 강하게, 그토록 알아챌때까지 오래오래 자극을 줬을까. 피부를 뚫고 딱딱한 뼈를 뚫고 단단한 내부조직을 뚫고 심장이, 정신이 느껴지게 할 정도면 얼마나 지속적으로 간절하게 강하게 .... 나에게 신호했단 말인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빛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먼지를 본다. 

눈을 뜨고 걷지만 이마에 닿아야 거미줄이 있음을 안다. 

우리가 실제 본다는 것은, 

피부에 느껴진다는 것은 알갱이가 큰 순서대로 감지되는 것일텐데 

둔한 나에게 얼마나 알려주고 싶었으면 먼지보다 작은 크기로 자신을 분해해 내 모공을 뚫고 내 가슴에까지 도달해 자극을 준 것일까? 

얼마나 작은 알갱이들을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자주, 얼마나 힘주어 두드렸길래 내 오장육부를 뚫고 가슴으로 그것이 느껴지게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이 자극을 따르지 않을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둔한 주제에 그것을 거부할 용기를 도대체 진정한 용기라 할 수 있을까?

둔한 주제에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성이 감히 인간의 이성적 사고라 할 수 있을까?

둔한 나에게 이토록 애써 알려줬는데 감사히 받지 않는 것이 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국, 

'나의 감각, 즉 느낌은 

영혼의 자극에 대한 반응'

인 것이다! 

수용하든 훼방놓든 자극이 왔으니 내 감정은 진동하는 것이다.        


아마 누군가가 지금의 나처럼 이러한 자극이 너무나 소중해서 명명한 듯하다. 

'직관'이라고 말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외친 것과 같은. 어떤 강렬한 자극이 자신에게 온 것, 아니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해서 꼭 알려야 하는 무언가를 제발 내가 알아차리도록 영혼은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소진시키며 나의 신체를, 정신을 뚫고 자극을 준 것이다. 그러니 이유불문하고 자극에 민감해야 한다. 질서없이 어지럽혀져 있거나 관념 덩어리로만 자리한 정신은 영혼이 아무리 자극해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다. 못 알아채면 그나마 둔하니까 그렇다 할 수 있지만 알아챘는데도 인식이 막아버린다면 이 얼마나 오만한 처사인지....      


이러한 근거로 인해 나는 

'직관'을 영혼이 날 자극한 것이라 인식하기에 느낌이 오면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내 머릿속에서는 도대체 가늠할 수 없는 그 어딘가로 나를 떠미는 기분이다.

또한 이 자극의 주체가 영혼이니 분명 우주와 교신하고 나에게 보내는 신호일텐데,

그렇다면 옳은 방향으로,

내가 서야 할 자리로 나를 이동시키려는

'저 높은 곳으로부터의 의지', '내 의지를 너머선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직관에 따르는 행동은 그 결과가 예측할 수 없는 시점으로부터 예측불가능한 크기와 무게로 드러날 확률이 높다. 나의 인식의 범주 안에서 계획되지 않고 '저 높은 곳의 의지'로부터 어떠한 설계에 의해 내가 선택되어 이뤄지는 일이니 우리는 이것을 '창조', '창발', '창의적 발상'이라 해도 좋겠다. 


영혼의 자극이 감각으로, 감각이 감정으로, 감정이 정신으로, 정신이 행동으로 연결되어 실재화된 결과로 드러는 것. '창의적 발상'인 것이다. 

이 발상이 현실화되면 '창조'되었다 하고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우리는 '창발'이라고 한다. 

질서잡힌 정신은 선한 창발을, 

질서없는 정신은 악한 창발을 창출하겠지.           


느낌! 즉, 감각되어지는 순간 앞서 수차례 언급했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성을 출두시키는데 이를 '호기심'이라 한다. 호기심은 관심으로, 관심은 관찰로, 관찰은 지식의 탐구, 즉, 앎의 욕구로, 앎의 욕구는 인지(intelligence)로, 인지는 새로운 지식(이론+경험)의 투입과 뒤섞임(융합), 연결을 통해 지각된다. 지각(知覺)은 풀어 말하자면, '앎(지,知)'을 '완전한 인식으로 깨닫는(각,覺)' 것이기에 지혜롭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단, 여기에 윤리적인 선(善)을 기준할 때에만 진정한 '지혜'라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지혜의 시작 역시 감각으로부터다. 

내친 김에 여기에 정신과 마음까지 거론해보자. 우리는 감각되어지기에 알고자 하는 욕구가 시작되고 욕구의 정체가 궁금해 앎의 세계로 발을 들인 후 그 곳에서 기존의 앎과 새로운 앎이 섞이고 깎이고, 말 그대로 갈고 닦이며 일상의 선(善)한 경험과 접목된 '앎'의 실천이 나의 정신에 궤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삶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해 초월적 감각인 지혜와 통찰, 직관과 같은 고차원적인 능력(형이상학적 고찰, 초월적 지각)의 배양이 필요한데 이러한 배양의 정돈과 질서를 위해 우리는 마음의 평안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작용은 나의 '업(業)'을 위해서이며 '업'을 위한 도구가 '일'이다. 


또 다시 결론적으로, 

창의적인 발현의 시작, 

'업'의 현실적 실현 역시 감각에서부터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내 일 같지 않고'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등

자꾸만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느낌.

이것은 '일'이 '업'과 연결되지 않아서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는!

감각에 민감해야 하고(후천적으로 감각의 민감성은 기를 수 있다.) 

감각으로 전해진 것을 일단 머리로 이동시킬 수 있어야 하고! 

머리에서 다시 손과 발, 혀를 움직이는 경험을 보태 

고차원적인 능력을 배양, 성장, 숙련시킬 수 있어야 하며! 

마음의 평안함을 유지하면서! 

나의 삶의 길을 찾아 걷는! 

즉, '지각'의 방향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 


애써 배워야할 것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늘 깨어있는 나의 의식이 지각의 숙련과 성숙을 도울 것이다. 

이리도 중요한 영혼의 자극을 무시하는, 

절름거리는 정신이라면 삶이 곤란해 할 것이다. 

반면, 

영혼의 자극에 무릎꿇는 정신이라면 가히 삶이 박수쳐 환영하는 유용한 삶인 것이다.   


각 개인의 인생을 잠깐 뒤돌아보면 예측가능했던 일보다 우연이라, 행운이라, 기적이라, 뜻밖이라 불리는 어떤 상황에 의해 인생이 역전되거나 전환된 경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조직도, 사회도, 세상도 모두. 이러한 모든 결과들이 우리가 영혼의 신호에 반응한 결과인 것이다. 


영혼의 지속적이고도 간절한 자극이 우리의 감정과 정신, 행동으로 이어져 어떠한 창발을 이뤄내는지, 그리고 어떤 창발이냐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이롭게 순환되어가는지, 개인의 민감성, 아니 '초(超, hyper)민감성'이야말로 개인의 역사, 시대적 진화를 이루는 기초이자 기반이 되는 능력임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자극을 무시하여 이후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기 전에 제발 자신의 가르침을 들으라 외치는 에머슨(주4)의 간절함을 가슴열고 들어보자.

                       

우리는 시인과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참된 지침을 따르기 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섬광처럼 찾아오는 그 직관을 미처 주목해 보지도 않고 습관처럼 지워버렸던가?

(중략) 

이 가르침을 들어라!

"반대편에서 어떤 시끄러운 외침이  들리더라도 따사롭고도 과감하게 자신의 자발적인 신념과 직관을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어떤 낯선 이가 다가와 따져 물을 것이다. 그대는 늘 무엇을 생각해 왔고, 무엇을 느껴 왔는가?" 

나에게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지 않은 이유때문에 한없이 초라해보이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서야 되겠는가? 


주1> 영원의철학, 올더스헉슬리, 2014, 김영사

주2> 그리스철학자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2016, 동서문화사

주3> 왓칭, 김상운, 2011, 정신세계사

주4> 자기신뢰철학, 랄프왈도에머슨, 2010,  동서문화사


* 12/21일부터 연재요일을 개편하오니 아래를 참고바랍니다.

   월 5:00a.m. [지담단상-깊게 보니 보이고 오래 보니 알게 된 것]

   화 5:00a.m. ['철학'에게 '부'를 묻다]

   수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MZ세대에게 남기는 '엄마의 유산']

   금 5:00a.m. [느낌대로!!! 나홀로 유럽]

   토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지담놀이터입니다.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삶과 사유, 사람의 찐한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https://cafe.naver.com/joowonw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