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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Dec 29. 2023

유럽행 1일전, 또 응급실

나홀로유럽 1일전

* 본 연재글은 지난 10월, 50평생 처음 홀로 여행을 떠나며 아무 계획없이 있는 그대로에 노출되며 제가 느낀 감각을 피력한, 기행문이 아닌 일기형식의 자기고백록입니다.


2023. 10. 22    


나는 그렇게 나아질 줄 알았다. 

내가 자신한 것인지, 자만한 것인지, 

자신과 자만은 

'겸손'의 강을 사이에 둔 전혀 다른 두세계다. 

나는 그 경계를 살짝 넘었다. 


내 건강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넘쳐 자만으로 이른 것이었다. 하긴 건강검진조차 한번도 받지 않은 인물이니까.


10/21일 유럽출발 2일전인 10/19일. 

ct를 거부한 채 병원에서 나온 나는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고 땀을 뻘뻘 흘리고... 딸이 쑤어준 죽을 겨우 먹긴 했지만 그래도 아팠다. 배의 통증도 계속되었고 몸은 계속 추웠다.

     

기본이 무너진 것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이다.

내 몸뿐만 아니라 나에게서 드러나는 모든 것은 나의 보이지 않는 것의 증상이다. 

무엇이 무너졌는지 나는 습관처럼 논리를 만들었다.  

   

몇 달전부터 나는 운동을 하지 않았고 5년간 매일 아침 먹던 단백질도 게을리 먹었다. 이 둘의 결합은 당연히 근육을 약화시켰을 것이고 그 결과로 한달전부터 다리에 쥐가 나서 깨기도 일쑤였고 2주전부터는 늘 달고 사는 위염이 도져서 속도 힘들었다. 이같은 증상을 하나하나 살짝씩 몸이 말하고 있었는데도 무시했더니 이제 보이지 않는 장기쪽에서 강하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가장 약한 장기부터 말이다. 정신차리고 알아먹으라고! 하면서.

   

그래도 어제보다는 살 것 같아서 살짝 걸어 동네 내과를 찾았다. 의사는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드러내면서 '배아픈데 유럽가서 혹시 맹장이면 일 나잖아요. 유럽 취소하든 CT로 맹장이 아닌 걸 확인하든 오늘 당장하세요!'한다. 아! CT! 이런... 그 길로 다시 어제 갔던 응급실에 갔다. 


공간은 공간에 어울리는 사람을 만든다. 

기가 막히게도 응급실에 가려니 배가 더 아프고 열이 더 올라서 힘들었다. 

응급실에 갈 정도로 힘들지 않았는데 

응급실에 가려니 내 몸이 거기에 어울리는 몸이 되었다. 

이런 경험을 다 하다니... 


암튼 응급실에 딱! 적합한 사람으로 그 곳에 도착한 나는 

다시 중증환자로 분류되어 침대에 누웠고 CT를 찍었다.     

결과는. 응급처치에 관련한 부분만 나오지 자세한 것은 며칠 뒤에 알려준단다. '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명제를 하필 그 때 나는 확인하고야 만 것이다. 다행히 맹장은 아니었지만 골반에서 염증수치가 높게 나타났고 빈혈수치는 9점대로 평균이하였고 이렇게 빈혈이 심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했다.


걸을 때 힘들지 않았는지 계단오를 때 숨차지 않았는지 등등을 물었고.. 매일 1만보를 걷는 나는 늘 그랬으니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고 답했고 빈혈은 헌혈할 때마다 빈혈때문에 못해서 빈혈인지 알았다고 말했다. 실제가 그랬고 무감각했던 내 행동이 그쪽 사람들에게는 건강에 무심함을 너머 무지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억울했지만 뭐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리고 무거운 짐 하나를 안게 되었다. 40-50의 여성가운데 40-50%가 겪는 '평균'적인 이상증상. 자궁에 문제가 심각했지만... 그래도 뭐, 나는 그런 거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나도 그런 혹 하나쯤은 몸 속에 있겠지...또 다시 건강에 대한 무심함이 발동했지만 의사의 한마디, 너무 커서 얘가 옆의 장기를 누르고 그로 인해 원활하지 못한 장기들에서 염증이 계속 생길거다. 얘를 없애든지 어찌 조치해야 한다는 말로 결론이 났고 당장 입원을 권했다. 


5일이나. 

이런.     


10일간 여기 없을 것이며 그래서 응급상황이 아니라면 10일 뒤에 병원에 다시 오겠으니 약을 달라. 내 입에서 약을 달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것은 순전히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유럽여행때문이다. 유럽이 아니라면 내 입에선 약을 달라는 말이 결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다음날이 출발인데 그 곳에서 배가 아프고 열이 오르면 골치아파진다. 암튼. 혼자 여행이라 어찌 해볼 도리가 없어 약에 의존하기로 했다.

     

난감한 상황을 자초하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고집이고 고집이 아니라 생떼이며 생떼를 너머 무식한 자의 만행인 것을 아는지라 '약을 달라'는 내 고집을 꺾은 것은 참 잘한 처사였다. 그렇게 3일치의 약을 처방받고 그 날은 진통제와 해열제를 남김없이 다 맞고 응급실을 나오는 착.한. 내가 되었다.


자만과 교만, 겸손과 자각 사이에서 나는 오락가락하며 내 신체에 대해 조금 더 찬찬히, 아주 오랜만에, 그리고 아주 정성스럽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의학적 지식은 바닥이지만 내 몸에 대해서만큼은 나만한 의사가 없다고 여전히 자신하는터라 나는 결론을 내려야만 하는 주체가 되었다. 

책임지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서운 짐이다. 

내 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의 몫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도 스스로가 주체로서 살아가지 못한다.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듯도 하다.

집을 사고 돈을 모으고 자신을 꾸미고 자기 일을 갖고 다들 그렇게 살지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왜 내가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해,

나아가 '내 삶은 어떤 삶인지'조차도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누구나 비슷한 모양새를 가진 인간인데

어떤 누구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삶과 자신이 하나가 되지만

어떤 누구는 삶이 무엇이며 자신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산다.   

  

나는 전자의 방향으로 살고자 애쓰는 사람중에 한사람이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인데

이 시점, 10일씩이나 (비자발적이었지만) 자유가 주어진 이 시점에서 내 인생에 뚫린, 

아니 뚫린지 몰랐던 구멍을 지금 들여다보게 되었고

작은 구멍은 결국 전체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기에 작지만 메워야 할 책임이 내게 주어졌다.

지금 빵빵하게 하늘로 오른다 자만하지 마라.

표나지 않게 뚫린 바늘구멍은

어느 높이까지 풍선을 띄울 수는 있겠지만

곧 추락할 것이다.

 

여하튼,

당장 응급수술이 아니니 지금 결정하지 않고 내버려둔채 나는 가던 길 계속 가기로 했다.

뭔가 고민해야 할 사항, 결정해야 할 사항이 있을 때 나는 직관에 따른다.


순간 결정이 나면 그대로 밀어붙이고

계속 고민을 요하는 사항이라면

뇌의 한 켠에 그 문제를 가만히 둔다.

그리고는 늘 하던대로 산다.   

   

일상을 살지만 그 고민의 정체는 조용한, 그저그런 하루 속에 침투하여 순간의 연결점을 만들어내고 그러다가 어느 날 저절로 결정되어진다. 이는 내 머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체'가 내리는 결정이라 더 효율적이다. '나의 전체'라 하면 내 머리와 가슴과 영혼. 이들 모두가 연합하여 자기들끼리 무수한 의견을 나눈 후 어떤 순간에 나에게 결정을 통보한다.


다행히 진통제를 듬뿍 먹어서인지 간밤엔 별 탈이 없었고

늘 하던대로 새벽 4시독서도 무리없이 해냈다. 

10/21일 11시 30분. 잠시 후 대한항공을 타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은 출발당일 06:34분.

이제 양말챙기고 가방 지퍼를 닫으면 준비끝.     


다음 글은 비행기안에서 쓸 듯하다.  

5년여전, 보라카이를 다녀온 후 오랜만의 외출이다.

그간 나를 스스로 구속했고 집중했고 공부했고

순전히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혼자 강행하게 된 유럽행.

아무 생각도 계획도 가고 싶다는 마음까지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태지만 

나는 간다.


말도 안되게 5년여의 시간동안 단 한차례 병원갈 일없이

나는 건강하게 독서에 집중했는데

출발전 이틀이나 응급실에 머문 몸을 데리고 일단 간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든

새로운 공간에서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는 법이니

새로운 내가 새로운 방식으로 어찌하겠지.


나의 일상은 초자유의 자세를 유지하면 된다.

초자유란. 

정신에 잡힌 질서에 의존하되 한계를 두지 않고

일상은 그대로 유지하며 묵묵히 걷는, 그런 자유.

초자유로 무장한 채

새로움과 섞일 준비가 된 나는  

그냥 그렇게 유럽에 가져갈 짐가방의 지퍼를 닫고 신발을 신었다.

  

==> 느낌대로! 나홀로유럽 3편, 어쩌다가 계획도 없이, 그것도 비자발적으로 유럽을, 지중해크루즈에 몸을 싣게 되었는지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지담놀이터입니다. 

  독서, 글로 많은 이들과 함께 하는 놀이터,

  삶과 사유, 사람이 함께 하는 곳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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