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담단상 21
나에게는 유일한 벗이 있다.
새벽이다.
새벽은 내게서 드러나는, 억지로 뱉어내는, 참으려 해도 토해지는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내게 이유로써 알려준다.
나에게는 유일한 충복이 있다.
책이다.
책은 어떤 경우에도 내 비위나 눈치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나를 다그치고 심지어 협박도 일삼으며 나를 가르친다.
나에게는 유일한 속박이 있다.
자유다.
자유는 내게 아름답고 고결한 단어로 다가와 현실의 나에게 '자신'을 가지려면 여기서 이렇게 구속해야 한다고 외친다.
나에게는 유일한 후회가 있다.
정성이다.
사람은 지나가는 존재이면서 항상 얼룩과 상처와 연민의 흔적을 남기는데 나의 지나친 정성은 '관계'라는 단어의 결을 때로 매끄럽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에게는 유일한 형식이 있다.
사고다.
나의 정신은 인식하는 한 영원한 사고의 형식(주1)을 지닌다.
사고의 형식이 체계를 제대로 갖추려면 나는 늘 의식과 인식사이를 바지런히 오가야 한다.
나에게는 유일한 어려움이 있다.
멈춤이다.
멈춤은 앞으로 직진밖에 모르는 나를 세우기 위해 늘 '멈출수밖에 없는' 현상을 들이댄다.
참으로 어렵다.
해석이 되지 않으면 멈춤은 포기가 되기에 해석이 되어야 멈춤은 쉼이 된다.
어렵다.
나에게는 유일한 도구가 있다.
중용이다.
중용은 보이는 이면의 본질을 보게 하며 현실이면의 이상을 상상케 하기에 중용을 더 갈고 닦는 것이 내 하루의 임무다.
나에게는 유일한 곤란이 있다.
철학이다.
철학은 철학자가 아닌 나를 꼼짝못하게 각성시키는데 이런 불편함이 지나칠 때 나는 그저 나의 사상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려 한다. 하지만 철학이 없는 삶은 정신이 죽은 육체와 다름없기에 철학을 삶과 연결시키는 곤란은 항상 난감하지만 필요하다.
나에게는 유일한 삶이 있다.
내 정신이 현재의 나를 떠나 영원과 손잡는 그 순간,
자주 또는 가끔 찾아오는 그 순간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따라서,
지금 돌아보건데 내가 죽을 때 내가 '삶'을 영위했던 시간을 따져본다면 불과 몇시간에 불과하지 않을까...
삶의 시간을 조금 더 늘이는 의무를 오늘도 조금 보태보자.
삶의 연장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 순간을 더 길게, 더 자주 갖는 것이다.
주1> 스파노자, 윤리학 (키에르케고르 선집, 1994, 집문당 p.23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