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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26. 2024

삶의 등에서 내려
삶 앞에 나를 세운다

Zadar로 가는 검은 크루즈 안에서

 2023. 10. 25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 시내를 마구 쏘다니고 돌아온 크루즈안. 저녁도 먹지 않고 그대로 시체처럼 쓰러져 잠든 나는 저녁 10시에 눈을 떴다. 


선상으로 올라가 그냥 흐느적대며 걷다가 과일 몇 개로 배채우고는 크루즈에 오른 지 며칠만에 처음으로 여기저기 어슬렁 구경삼아 걸어보기로 했다.



인형뽑기가 아닌 돈다발이.ㅋㅋㅋㅋ


난생처음 카지노라는데도 들어갔다. 입장료나 주민증 검사도 없는데 입구에서부터 들어가도 되나 기웃대며 망설였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없었지만 난 머뭇거렸다. 말도 안되는 말인줄 알면서도 마치 들어가면 마피아나 조폭들만 있을 듯해 나는 잔뜩 겁을 먹었다. 그리고는 겁먹은 내가 너무 웃겨서 그냥 오른쪽 다리를 카지노안으로 쑥. 


항상 날 방해하는 것은 나다. 

나의 인식과 관념이 항상 날 주저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본대로 사람들이 패를 돌리고 웃고 떠들고...그게 다였다. 한참을 서서 사람들 표정만 구경했다...한 번 해봐? 싶은 마음은 찰나에도 들지 않았으니 나와는 영 거리가 먼 공간이다.  


크루즈 내 미술전시관

조금 걸으니 '크루즈미술관'.

음악 미술에 문외한인 나이지만 그래도 가슴을 울리는 그림 앞에 한참을 서서 바라볼 줄은 안다.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는데 그림을 잘 그리면 좋겠다는 욕심은 있다. 

말도 안된다. 

그리지 않는데 잘 그리면 좋겠다고? 


인간의 욕심은 항상 멀리뛰기를 한다. 

하지 않으면서 되고 싶은, 

이런 탐욕덩어리! 


칵테일바는 나에게는 약간의 동경이다. 바(bar)에 앉아 바텐다가 섞어주는 칵테일 한 모금 마시며 낯선 이와 도란도란 얘기하는... 어슬렁 돌아다니는 좌우 거리가 온통 칵테일과 맥주, 양주를 마시는 Bar다. 나는 기웃거리다 만다. 


완벽한 이질감이란 이런 건가. 저 속에 섞여 웃고 떠드는 나의 모습이 상상으로 즐겁긴 해도 현실에서 재현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이런 경우는 의외로 많다. 그럴듯한 별장 하나 가지고 철마다 쉬러 가고 싶지만 그저 집이 좋으니 상관없고 마당가득 장독대에 내 손맛이 가득한 장들이 담기면 좋지만 그냥 사다 먹는 만족이 더 큰. 


이상이라고 모두 다 현실로 가능해야 할 필요는 없다. 

상상 속에서 즐기는 이상이 마냥 쓸데없는 허상이라 지껄였던 내 생각이 조금 깨지고 있다.  


칵테일바에서 맥주한잔도, 카지노도, 그 무엇도 내 관심을 끄는 것이 없는 이 거대한 공화국, 늘 그랬듯 선상으로 올랐고 지중해찬바람에 목이 칼칼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이내 방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벌써 자정이 다 되어가고... 공해상이라 인터넷도 되지 않고...

오로지 내가 가진 것이라곤 노트북과 책뿐. 

가진 것으로 놀기 시작!


읽고 쓰고만 하는데 시간이 벌써 새벽 4시 13분. 지금 이 글을 쓰다 확인한 시간이다. 작은 객실은 책상 대신 화장대만 놓인지라 침대에 기대다 화장대에 앉았다... 이 시간을 꼬박 보냈지만 지겹지 않다. 카지노나 칵테일바보다 더 신나게 순식간에 새벽시간을 후루룩 보내버렸다.

새벽 내도록 읽다가... 쓰다가...


여행 간간이 읽을 책으로 볼테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으로 읽히지만 강렬한 한방으로 나를 깊이 잠기게 한다. 이렇게 잠기면 한참 뒤에야 수면으로 오르게 해주는 책이 여행지에선 딱이다. 소로우도 함께 가져왔지만 소로우는 문장마다 그 속으로 날 심하게 빠뜨리니 여기선 살짝 거리를 두고 있다. 릴케의 시집은 내일쯤 꺼낼 요량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어딘가에 깊이 빠질 수 있다.

어느 것도 볼 것이 없을 때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던 것과 마주할 수 있다.

어떤 놀이감도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구속에서

오로지 자신과 만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모든 장비들에서 해방되어 가지고 놀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 나만 가지고 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하고 싶고 할 수 있기에 어쩌면 정작 해야 할 것을 자꾸만 미루는지도 모른다. 여행올 때 앞으로는 빈 손으로 와도 문제없을 듯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뭐든 할 수 있는 지금’을 선물받은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삼고 떠벌리기 좋아한다. 

나도 일정부분 그렇다. 

그런데 아는 것도, 하는 것도 없으니 나는 내 얘기만 주구장창한다.


내가 젤 재미난 장난감이고

내 생각이 젤 재미난 퀴즈거리고

내 몸뚱이 닿는 곳이 젤 재미난 퍼즐게임이다.          


집에 가고 싶냐고? 

혼자라서 외롭지 않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질문이 잘못되어 답을 할 수 없다고 말하겠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을 금새 나의 터로 만들어버리는 비상한 재주(?)가 있어서 집생각은 별로 없고 똑같이 주어진 시간에 집에서 마실가듯 나온 지중해라 별반 불편한 것도 없다. 여행할 땐 사는 것 같다가 집에 갈 땐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그렇게 삶을 두동강내지 않으니 나에겐 일상이나 여행이나 매한가지다. 그래서 외롭지 않은 것인지도. 아니, 나는 늘 외롭기에 외롭지 않다. 이미 고독은 나의 절친한 친구가 된지 오래다. 


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은, 또는 내가 아닌 듯한, 그렇게 나에게서 분리된 채 한참을 살아왔고 그래서 겪었던 긴 기간의 공허함이 외로움이라면 외로움일까. 결코 익숙해서도 익숙해지지도 않던 그 시간들을 지나 이제 나는 늘 나와 함께 노니 외로울 틈이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누구와 함께’하면 외롭지 않을까?

‘누구’란 타인이 아니라 나여야 한다. 

내가 잡은 나의 손을 놓치면

아...나는 지독하게 외롭겠지만 

지금... 

나는 내 손을 잡고 

내 삶이 내민 등에 업혀 있기에 충분히 괜찮다.   

        

심지어 지금 나는 나에게 주어진 완벽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느라 분주하다. 해야 할 일이라곤 오로지 나와 노는 것뿐이니 나의 정신과 영혼의 연결을 더욱 촘촘하게 만들어내는 것에 나는 이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모두 투입할 것이고 그래서, 사실 조금 더 분주한 것도 사실이다.


오늘이 여행며칠째인지 잘 모르겠다. 날짜도 요일도, 한국이 몇 시인지도 확인하지 않으면 모르고.. 

아무튼 나는 여행이라는 공간이동을 통해 오로지 시간과 장소의 즙을 짜내어 나에게 주입하는 것에만 온통 관심을 두고 있다. 


스케쥴을 보니 크루즈는 지금 Zadar로 나를 데려가고 있단다. 

그 곳에서 나는 또 광기를 부리며 돌아다니겠지. 

그러다 어딘가 한 지점에서 또 나의 버블들을 내뿜으며 한참을 나와 속삭이겠지.


이렇게 잘 지내는 나에 대한 검증을 근거해 

나는 좀 더 확신을 세워본다.


첫째, '계획'이란 게 참으로 무용하다는 것에.

결코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며 무계획이 계획보다 더 근사하다는 방향으로 나는 패를 돌리련다.

'의외',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더할 나위없이 유서깊은 귀족이다(주1). 


둘째, '인식'의 가치를 좀 더 폄하한다는 것에.

사람들은 대개 하던대로, 있던대로, 보던대로 돌아가려 하지만 강렬한 새로운 감각적 진입은 단단했던 정신에 금방 틈새를 만들어 비빔밥이 참기름한방울로 화룡점정을 찍어 완성되듯 차원이 다른 정신세계로 영혼을 초대한다. 초대된 영혼과 함께 열심히 틈새를 메운 정신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게 정신은 자신의 과거를 자체제거시키며 새로운 미래로 자신을 이끈다. 나는 따라만 간다.           


계획도 인식 속에서 창출된다. 

인식은 과거 경험의 잔재다. 


결국 

계획하고 대비하는 것은

미래의 안정만을 바라는 비겁한 심보(마음이 바라는 보상)이며 

안정만을 바라는 것은

새로운 미래임에도 혼란없이 살아낼 수 있다는 무지로부터의 자만이다


혼란스러우면 걱정되고 걱정되면 해야 할 일을 망칠까 두렵고... 

이러한 순환속에 한자리 차지하는 것이 계획이다. 

계획이라는 처방의 약효는 '될 것 같은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이니까.

미지-걱정-혼란-두려움-계획. 

계획자체에 이미 불안정이 내재되어 있기에 

이는 바깥세상의 어떤 현상을 만나면 전제된 불안정을 자기 앞으로 불쑥 내밀어버린다. 

따라서, 나는 인식속에서 창출된 계획은 되도록 멀리하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고 누리고 있지 않은가?

아무것이 없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아무도 없어도 결코 외롭지 않다.


삶의 뒤에 서서 삶이 남긴 것들을 쌓아둔 인식이라는 창고에 의존하여 계획을 세우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미지(未地)’는 공포를 전면에 들이대지만 미지(未地)는 미지(味知, 알 수없는 맛)이지 쓴맛이 아니다.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걱정과 불안이 손잡고 데려온 계획, 대비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에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겠다. 은밀한 근심은 공공연한 비참함보다 더 잔인한 법(주2)이니.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계획하지 않고, 판단조차 없이 오로지 자신의 삶의 목적을 향해 나를 내던져보련다.

삶에 대한 애증과 갈구가 

인식에서 벗어나 미지로,

계획이나 안정에서 벗어나 

모험이나 결단으로 이동할 때 

영혼이 옳다구나! 박수치며 

새로운 성찬을 내 앞에 차려줄 것이다. 

대충 이뤄지는 것은 없다. 

잃을까 두려워 

두 손 가득 손에 쥔 것을 들고 조금씩 자주 빠르게 걷든, 

두 손 가득 손에 든 것 내려놓고 두 발로 성큼  뛰든


어떤 식으로든 

지금 업혀있는 삶에서 내려 

나를 내 삶 앞에 세워보자. 


살짝 토라져 있던 내 삶이 날 한번 제대로 쳐다봐주지 않을까?

그러면, 삶의 손을 꼭 잡고 노래부르고 웃으며 신나게 춤춰 보는거다.    


pause


새벽... 

다시 선상에 오르니..

지중해의 태양이 뜬다.

이제 조식먹으러 볼테르랑 가야지...    


주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2000, 책세상

주2> 볼테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2017,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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