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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28. 2024

관계의 선(線) - 딱! 여기까지만!

'권리'와 '혜택'에 대하여

아주 젊었을 땐 이 친구 저 친구 얼굴알면 다 친구였다.

조금 젊었을 땐 이래서 친구 저래서 친구아님 나름 경계가 생겼다.     

약간 나이드니

관계란 것은 참으로 참혹하게 날 망가뜨릴 수도 있음을 알았다.

관계란 것은 나에게 착함을 강요하기도 하고 착한 척을 강제하기도 했다.

관계란 것은 나보다 나를 더 부각시켜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포장되었었다.

관계란 것은 나보다 나를 더 절각시켜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조각되었었다.

   

나는 

친구라는 단어를 아무에게나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가까이 해야 할 사람, 피해야 할 사람이 가려졌고 가린다.  

나를 포용력이 부족한 사람, 관계에 취약한 사람이라 비웃어도 좋다.

나는 모두를 포용할 수 없고 모두에게 대면대면거리기도 싫다.

포용할 사람은 끝가지 힘껏 가슴으로 안아주고

대면대면거릴 바엔 그저 모르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게 낫다고 여긴다.

나라는 사람이 지닌 한계와 에너지의 총량이 있기에, 이 모든 것 안에서 진짜 나와 결이 같은 이에게 내 모든 것을 다 주며 나누며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 선은 간단하다.

혜택과 권리의 선.     

이 경계가 내가 관계를 지속하느냐 의도적 단절을 선언하느냐를 가린다.


관계가 지속되면 분명 이 순간이 온다.

내 옆의 누군가는 혜택을 권리로 착각하고 그 때 나는 당분간 그를 멀리한다. 

내 옆의 누군가는 불편한데도 혜택을 혜택으로 이해, 계속 보은하려 한다. 

나는 그러한 이의 영원한 벗이 되길 염원한다.     


내가 나름 관계의 선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2가지로 인해서다.


먼저, 내가 뿜어내는 사랑과 관심은 나의 영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소중한 것이다. 단순한 물리적인 시간, 물질적인 돈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비물리(질)적인 정성, 지식, 마음까지 모두 담겨 있다. 항상이라고는 자신못하지만 거의 대부분 진심을 다해 말하고 행하고 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소중한 것들을 소중히 여겨주는 이에게로만 베풀기로 한 것이다. 나는 나의 이것들을 싸구려 취급하는 이에게는 내 곁을 내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상대를 더 깊이 위하기 때문이다. 혜택은 빚이다. 받은 것이니 돌려줘야 하는데 권리로 착각하는 순간 나눠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내가 위로와 위안을 계속 한다면 상대는 위로와 위안에 길들여져 늘 의지하는 사람이 된다. 위안은 상대의 경솔함과 무의미함을 오히려 포장해주는 아주 저주받을 짓(주)임을 알기에 내가 칭찬만 계속 한다면 그는 칭찬에 길들여져 사회에서 맞게 될 뭇매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안타까운 마음에 뭔가를 계속 알려주는 것은 상대가 스스로 알아낼, 경험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나는 '상호독립적(interdependent)'인 관계야말로 세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관점에서 누군가를 끊임없이 정서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위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 서로간에 악을 자처하는 행위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관계에 일정한 선을, 기준을 그어둔다.

하지만 이는 내가 오만하고 거만하여 군림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나를 보호하는 것도 나의 역할임을 수용했고

권위(authoritarian)가 아니라 권위로운(authoritative) 자로 나를 세우려는 것이며

상대를 진정 더 사랑하기 위해 내가 근절하는 것이 상대 스스로가 자신을 자극할 수 있다는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감사를 잃으면,

소중함과 귀함을 외면하면,

제 아무리 귀한 보석도 땅치기구슬과 별반 다르지 않게 취급하는 게 사람인지라

보석은 보석으로 볼 줄 알아야 하고

땅치기구슬은 땅치기구슬로서 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서로 존재하길 바라는 바이다.  

   

나에게 권리란 없다.

한 평생 내가 부여받은 숙제를 해야 할 의무만이 존재하고

한 평생 내가 받은 보상만큼 갚아야 할 채무가 존재하고

한 평생 내가 인지하지 못한  허무에 대해서도 계산을 치러야 하기에

죽을 때까지 어쩌면 내가 누릴 권리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권리를 누릴 자격도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권리는 '내가 받았는지도 모른 채 지나간', 마치 물과 공기처럼. 

아들딸, 건강, 재능 등으로 낼름 받아버린 그것들을 통해 충분히 누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나다.

나는 어떤가?

내가 혹여

누군가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받는 혜택을 

권리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나부터 스스로 숙고해야 한다. 

나는 그리하지 못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면 나는 위선자다.  

             

나부터 혜택을 혜택으로서 감사하며

끊임없이 내게 주는 자들에게, 세상에게, 

갚아가며 사는 것에 대해

치러야 하는 대가들에 대해

내 삶을 통해 보여줘야 함을 재고하면서

이 시간 또 다시 

'그냥', '묵묵히', 나는 내 걸음을 걷는다.


주>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마리아릴케, 2003,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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