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에 대하여
데카르트가 '나에게는 운이 많이 따랐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중략) 평범한 내 정신과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애가 허락하는 최고의 정점에까지 조금씩 내 인식이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주1)'라고 했는데 나도 데카르트만큼, 아니 그는 천재니 그렇다 치고 나같이 평범한 이에게 이런 정신이 새겨졌다면 나는 데카르트보다 무조건 더 운이 좋은 인간인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내 정신이 내 생애의 적절한 때를 제대로 만났다. 아이들은 만족할만큼 잘 자라주어 내 곁을 떠났고 젊은 성인시기엔 삶의 난해함을 경험으로 쌓았으며 이제 남은 인생 무엇으로 날 갈고 닦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어중간한 성인시기를 살며 나는 새로운 탐구로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바쁘니까 말이다.
나의 탐구에 세속적으로 어떤 보상도 약속된 바 없지만
내 안에는 엄청난 보상이 따를 것이라 믿는 한구석이 마련되었고
나는 나의 인식의 정점을 향해,
말 그대로 '나'라는 사람과 내게 주어진 시간의 골수까지 모두 빼먹겠다고 덤벼대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 능력을 믿고 능력이 주는 보상에 만족하며 젊은 성인시절을 보냈다면 이제는 '안다.', '몰라도 돼'라는 자만보다는 '모르면 안될걸', '나는 모른다'는 의도적 자기불신으로 기존의 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철학자들의 시선을 진입시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 중 무엇도 날 괴롭히거나 부당하다거나 불만족스러운 것이 없었으며 게다가 지금껏 내가 누려온 많은 것들이 앞으로 갈 길에 어떻게 연결될 지도 예측되는 바, 이 정도에서 나는 만족하지 않으면 탐욕스럽다 할 정도의 수위에 도달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의 것에는 만족을, 지금부터의 것에는 불신을 가지며 하나씩 더 깊게 파고들고자
보다 구체적으로 기억을 더듬는다면, 작정하고 지독하게 책에 매달리기 -정말 미친듯이, 간절하게, 집착하며- 시작했던 경계는 지금부터 딱 5년전, 2019년 2월 19일부터다.
갈증이 온몸을 덮쳐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닌데.' 라는 끝도 없고 답도 없는 한탄으로 보낸 시간들은 나를 책으로 인계했고 책은 지금 여기 이 자리로 나를 인계했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크게 깨닫고 대단한 업적을 남긴 것은 없지만 나의 행로가 상당히 방향을 틀었고 이 길이 아주아주 내 맘에 드니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닌데'라던 과거의 답없는 한탄은 '이렇게 사는 게 사는거지'로 전이됐다고 하겠다.
나는 치열했던 책과의 시간들을 통해 만물의 이치에는 양극이 존재하며 이 대립된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극과 극을 맞물려 사고하는 원리를 정신에 심었다. 한마디로 '이분법을 탈피한 사고'라고 할까?
이러한 사고는
삶의 '부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태들을 연역하고 추론할 수 있는 사고의 질서를 잡아주었고
모든 것을 문제가 아닌, 해결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줬으며
전체로서의 '나'를 알기 위해 나의 모든 정신과 육체, 감정까지 해체시키게 이끌어줬다.
가령, 내 미각이 내 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나의 독서가 저 먼나라 시골노인의 삶과 어찌 상호의존되는지와 같은 엉뚱한 연결에 대해 나는 몇시간이나 연역과 연쇄로 설명할 수 있으며, 아울러, 왜 세계의 물이 다 바다로 향하는데 바다는 넘치지 않는지, 왜 끊임없는 전쟁과 질병에도 인간은 멸종되지 않는지와 같은 말도 안되는 상상까지도 추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즐거운
여하튼 또라이같은 상상과 탐구의 현주소는 체계적이고 치열했던 반복된 시간투자, 기더라도 껍데기를 벗겨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집요한 사유활동으로 획득한 보물이며 이렇게 확보된 시야는 단지 넓고 멀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탐구로 이어져 나는 매일 매순간 궁금해하는 나의 정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더 깊이 숨겨진 사고의 양식을 채우느라 다른 어떤 것에도 시간을 둘 여유가 없게 되였다.
넒게 확장하면 더 깊이 파지고 더 깊이 파면 더 넓게 멀리 보이는 이치에 따라 나는 넓게도, 깊게도 나의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나만의 요령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자화자찬이 경망스럽고 자만스럽기도 해 가끔 나의 의식의 촐싹맞음을 나무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만족이 세속적으로 장담된 보상없는 이 길을 가게 하는 동력이기에 나는 이 촐싹맞음을 때때로 반기는 편이다.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책에 집중하여 나의 인식의 크기를 키우고 있다는 발설은 누군가도 그리 해야 한다고 훈수를 두거나 나처럼 하면 인생이 재미있어진다는 모방심리를 부추기고자 함이 아니다. 내 누누히 언급했던 바대로, 나는 '각자가 자기 인생에 책임지는 것이 가장 이타'적인 것이며 '교육은 보여주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그 본질을 따르는 중임을 직접 실천하며 보여줄 뿐이다.
나는 어디로 가야할 지의 길을 만났기에 운이 좋은 것이며 이 발설을 혼자만 가슴에 품지 않고 글로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걷는 이 길이 누군가에겐 득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저 한 중년을 걷는 여성의 삶의 일면을 본다는 것에 만족하며 이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혹여 더 바란다면 누군가도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가슴을 울리는 그것을 따르라 말하고 싶다. 그러면 엄청난 쾌락과 만날 것이라는 심정도 보탠다.
내가 겪은 바로는, '이렇게 살면 되겠지'라며 살았을 때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네'로 불안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물음이 나의 표피를 뚫고 한탄이 나를 옭아맬 때 책을 통해 '이게 사는 것이구나'를 느꼈다. 아는 줄 알았을 때는 오히려 불안했고 모른다를 인정했을 때 오히려 해답이 내게 등장했던 것이다.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능력주의 세상에서 능력믿고 살았던, 흔한 말로 잘 나가던 시절을 지나 능력이 소실되는 과정에서 나를 지탱해줄 근본이 부실했기에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느낌에 그저 삶을 연명하고 있었구나를 알게 됐다. 그리고 능력이 아닌, 근본을 서서히 채워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배움의 희열과 지식의 틈새가 메꿔지는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남들이 외면하거나 어렵다 치부한 책들을 찾아 읽어나가는 과정이 간절함을 비웃듯이 내 능력에 버거웠고 지금까지 그러한 것이 사실이며 그 어떤 책을 읽어도 이해되고 채워진다는 느낌보다 '난 왜 이런 것도 모르고 살았지?'라는 나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더 커졌던, 지금까지 그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불신은 겸손을 통해 확신으로 승격되었다. 인간이기에 '능력'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도, 채워질 수도 없는 근본적 부실을 메우자는 겸손. '나는 모른다, 고로 나는 배워야만 한다'를 붙잡으니 더욱 더 철학가들의 설파가 듣고 싶어졌고 인생의, 삶의, 나의 본성과 원리를 찾아 가는 나의 새벽독서의 시간은 그 어떤 일상의 폭탄에도 지켜내야 하는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책을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고 강의를 할수록 더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중독으로 나를 이끌어 이 외의 그 어떤 것에서도 나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더 큰 재미가 내게 주어졌고 이러한 중독이야말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기에 나는 더더욱 나를 중독시키려 한다. 얼마나 다행인가. 나같이 어느 정도 나이들고 아이들 남부럽지 않게 키워놓은, 수많은 여성들이 쇼핑중독, 알콜중독, 성형중독, 우울중독에서 헤매는 시간에 나는
하루를 나에게 허락해 '네 맘대로 하고 싶은 거 다해!' 하더라도 나는 아마 매일이 같을 것이다. 실제 매일매일 안하던 짓을 시도하고 있는 내게 어느 날 '오늘 하루는 정해진 거 말고 내 맘대로 살아볼까?' 했지만 별달리 할 게 없었다. 가고 싶은 곳도,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밥 좋아하는 나는 밥에 김치면 됐고 집 좋아하는 나는 집순이로 만족스럽고 집안에 내 책상, 내 책, 내 노트북이 있으니 난 모든 걸 다 가지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시간의 골수까지 빼먹으며 매일 신나는 놀이에 빠져 산다.
나는 '내 인생의 놀이터'를 만드는 중이다.
모든 인생은 자신만의 놀이터를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내가 만들어 가장 나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나만의 놀이터!
실제 놀이터의 기본은 바닥이다. 그 대상이 아이들이기에 일단 안전이 가장 기본이다. 다치거나 위험한 놀이터에는 제 아무리 재미난 놀이기구나 화려한 눈요기감이 있어도 아이들이 오면 안된다. 걸림돌도 안되고 미끄러져서도 안된다. 딱딱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물렁거려 제대로 뛸 수 없게 만들어도 안된다. 너무 면적이 좁아 서로 우왕좌왕하게 해서도 안되고 너무 숨을 곳이 많아 찾지 못하게 해서도 안된다.
내 인생의 놀이터도 그래야 한다.
대상은 나. 아무리 위험해도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근본적인 바닥이 우선 갖춰져야 한다. 바닥공사가 부실하면 놀이기구를 제대로 즐길 수 없듯이 나도 내 인생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내 놀이터의 바닥은 책, 글과 함께 하는 인간과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활동이며 다행히 지금까지는 바닥공사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기초가 잘 되면 나머지는 선택이다. 경제와 공간의 규모에 맞게 미끄럼틀이나 시소, 그네, 정글짐 등 맘에 드는 걸 비치시키면 된다. 이쯤 만들어 놓으면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를 찾을 것이고 놀다 맘에 들면 다른 동네 아이들까지 데려오겠지.
내 인생의 놀이터도 마찬가지다.
바닥공사가 잘 되어지면 글로, 말로, 또 다른 무언가로 놀이기구들을 세팅하면 되겠지.
그렇게 세팅된 것이 내겐 코칭이고 누군가의 꿈을 지원하는 브랜딩이다.
이왕 시작한 거 튼튼하고 재미나고 특별한 걸로 앞으로 더 세팅되겠지.
이렇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 사람들이 놀러 오겠지.
노는 맛이 좋으면 친구도 데려올 것이고 그렇게그렇게 전파되겠지.
이렇게 신나게 노니 나의 재미는 더욱 커지겠지.
그러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분명 나에게만 탁월한 재미를 주는 놀이기구를 알게 되거나, 나만의 특별한 놀이비법을 창조해 내겠지.
그래서 그 탁월함과 비법이 남들과 차원이 다른 그 경지까지 안내하겠지.
그러면 나는 더 리얼하게 설명해줄 수 있겠지. 내 놀이터에 놀러오는 많은 이들에게...
나의 자유와 행복과 평안은 점점 커질테고 나와 함께 하는 이들에게도 그것이 전염되겠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만드는 놀이터는 나를 위해 시작했지만 모두를 위한 것이라 해도 무관하겠지.
거기서 그토록 원하던 나만의 삶, 나만의 인생이 나의 서사로 창조되었음을 알게 되겠지.
그렇게 점점 이로운 사람이 되어가면 세상이 인정하고 보호해주겠지.
내가 알던 이들에게 의도적 단절을 외치고 스스로 고립을 택해 나의 인식의 성장에 할애할 시간을 확보한 것은 내가 한 결정 가운데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즐겁고 행복한 인생에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뜻이 맞는 몇몇과 신나게, 안전하게, 의미있게 노는 것이 중요하니까. 나 역시 그러한 관계들을 만들고 싶고 그러려면 내 정신이 담긴 내 놀이터가 만들어져야 하고 이 놀이터가 모두에게 개방되었을 때 그들이 스스로 놀이터를 찾아 등장하겠지.
케인즈가 러셀, 버지니아 울프와 놀았듯이
에머슨이 소로우와
몽테뉴가 라보에시와
릴케가 로뎅과 그렇게 작은 만남에서 소중한 인연으로 깊어졌듯이 나의 놀이터를 찾아 나와 함께 놀아줄 그들에게 나는 진리의 바다에서 작게 건져올린 한 바가지의 물만이라도 퍼내는 즐거움을 함께 하며 그리 평안하게 놀면 되겠지.
끝도 없는 바닥공사중이지만 나는 벌써 중독되었고 완공이 언제인지 내 정하지 못하지만 완공되어 함께 노는 상상만으로도 매일 매순간 행복하다.
꿈이 있다는 것은 이리 나를 살아있게 한다!
내 삶이 평면이 아니라 입체가 되게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줄의 선이 아니라 다양한 엮임으로 이어진 거미줄이 되게 한다.
나라는 사람이 물리적 존재가 아닌 화학적 변화를 거쳐 탄생한 인간이 되게 한다.
내 꿈이 무형의 안개가 아니라 선명하고 명철한 형체로 태어나게 한다.
내 하루는 그렇게 계산되어지지 않는 입체로서 부피와 밀도로 채워져 요긴하게 세상을 위해 쓰이게 된다.
바닥이 안전하게 마무리되면 그 때부턴 일사천리로 움직일 수 있다. 앞으로 50년 이상을 놀아야 할 놀이터이기에 소홀로 허술해져서도 안된다. 내 죽어서도 이 놀이터에는 수많은 이들이 드나들며 인생의 재미를 맛보길 바라는 맘도 크기에 속도보다는 무조건 방향이다. 지금, 에피쿠로스가 죽기 전 정원을 남기며 유언한(주2) 말들이 떠오른다. 나도 그리 하고 싶다. 닮고 싶다.
아마 앞으로 더 지독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읽는 책들의 두께는 점점 더 두꺼워지고 난이도도 갈수록 높아지며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시간을 많이 써야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사실, 얼마전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발행되지 않은 것을 직접 번역하기로 한 것이다. 그냥 놀이삼아 한다. 출판사에서 의뢰받거나 번역을 해본 적도 없지만 그냥 하기로 맘먹어서 그냥 한다.) 대한민국에서 공부한 사람치고 '기초부터 심화까지' 를 모르는 이는 없으니 괜찮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해설집과 문제집, 가르쳐주는 학원없이 나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인데 어쩔 수 없지, 난 어른이니까 괜찮다.
물론, 내가 집중적으로 탐구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나는 이제 탐구의 초입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역사나 문학, 종교에는 취약하며 고대의 정신을 내 것으로 습득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첨단과학을 이해하는 것에는 능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것들을 탐구하다가 혹 허상이나 지적허영에 빠질지도 몰라 한권한권 읽을 때마다 나는 나의 실상에 대입하는 것, 말하자면, 나의 과거를 연역하여 그 때 몰랐던 연유를 찾는 것에 더 철저했고 이를 통해 예측하는 힘, 통찰이나 예지력, 직관을 키워 미래를 대비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을 지금처럼 나에 대한 검열이 지속적으로 반복한다면 더 나아진 나를 내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쪽에서 괴테를 만나고 저쪽에서 루크레티우스를 영접하며 한쪽에서 블레이크를 음미하고 다른 한쪽에서 네빌고다드를 실천하기까지, 이 기묘한 나의 정신은 소크라테스가 월레스와틀스에 담겨 있고, 귀곡자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가 연결되고 정연보와 데이빗소로우가 같은 말을 하며, 몽테뉴와 신영복이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고 에머슨과 짐로저스가 같은 뿌리에서 줄기를 이루고, 올더스헉슬리가 앨빈토플러를 뒷받침해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연결로 퓨전을 탄생시키는, 말 그대로 이치가 연쇄적으로 정리되는 쾌감을 맛보게 한다.
가히 그 어떤 미각으로도 잡아낼 수 없는 지적식욕의 충족감.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최고의, 그리고 최선의 쾌락이다.
이는 다양한 분야의 죽은 자들과 함께 한 새벽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얻은 거대하고 풍성한 수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수확은
나를 스스로 고쳐낼 수 있는 힘이다.
마치 노트북과 같다. 나는 늘 노트북을 사용하지만 이 놈이 조금이라도 버벅대면 나는 손쓸 도리가 없다. 구조와 체계와 원리를 알지 못하기에 그것을 아는 이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나는 인생을, 삶을, 일상을 살지만 가끔 버벅대는 이 길에서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지적사유활동을 한다는 것은 가끔 고장나는 나의 길을 스스로 고쳐낼 힘을 갖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수확인가.
나를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힘이다.
'변화만이 영속된다'는 말은 진리다. 따라서, 변화를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혼란스럽게 해야 하며 혼란은 질서를 잡기 위해 정리를 요구한다. 정리가 안되면 항상 혼란한 채로 있거나 또는 그게 겁나 변화를 거부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나는 과거에 갇힌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삶을 살지 않고 목숨을 연명하는 그런 삶은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스스로 정리해낼 수 있는 힘이란
얼마나 대단한 수확인가.
나를 스스로 검열할 수 있는 힘이다.
정리를 했는 데 더 엉망이 되면 안하니만 못할 것이고 심지어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게 될 나이가 중년일테인데 정리하기 전후에 검열의 정신이 있다는 것은 지금껏 제대로 숫자를 채워왔다는 검증이며 앞으로도 숫자에 걸맞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을 예견할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수확인가.
나를 스스로 안내해내는 힘이다.
이렇게 남은 세월, 스스로를 세정시키고 고쳐가며 검열을 통해 정리할 수 있는 힘은 안전하면서도 경우있게 제 값하면서 나의 삶을 살도록 한다. 아울러 이러한 나의 삶이 나의 자식을 비롯한 나와 함께 내 인생에 머물던 누군가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더욱 바랄 게 없겠다. 이로써 꿈을 이룬 내가 누군가의 꿈이 되고, 꿈꾸며 살던 내 삶이 꿈꾸는 삶으로 누군가를 이끌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이 얼마나 거대한 수확인가.
그저 나 하나 제대로 살아보자 시작했던 독서가
이렇게 거창한 수확까지...
비록 초입일지언정 이미 내 안에는
주1> 방법서설, 데카르트, 1997, 문예출판사
주2> 에피쿠로스 유언 : 그리스철학자열전(동서문화사, 2008)의 p.664-66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