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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r 03. 2024

시력(視力)이 시력(時力)으로

'시간'에 대하여

나는 볼수도 만질수도 가질수도 옮길수도 늘일수도 줄일수도 키울수도 조절할수도,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묵묵히 내 속도로만 움직인다.  

   

골리앗이 아무리 센 힘으로 나를 밀어도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천재적인 머리로 날 가르쳐도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특유의 언변으로 나를 설득하려 해도

나는 결코 나만의 보폭을 조절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엄청난 사건사고가 세상을 놀라게 해도 나는 제자리에서 동동거리지 않으며

제 아무리 불행한 일로 통탄하는 이가 있다고 해도 나는 눈꼽만큼도 동정하지 않으며

제 아무리 극악무도한 짓을 하거나 천사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나는 더주거나 덜주는 법없이 모두에게 공평할 뿐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사이를 헤집으며 그들의 관계에 관여하고

사람의 정신을 과거와 미래로 이동시켜 그들을 통찰하게 하고

길가에 못난 잡초에도 

첨단을 자랑하는 우주선에도

나는 태양의 뜨고 지는 대법(大法)의 속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나의 이름은 

시간이다.     


내가 늘상 같은 모습으로 보여진다 여긴다면 어리석다!

나는 인간이 같은 자리에 서 있다 하더라도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초인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도우며

내가 인간의 정신에 개입된 누적만큼 현상을 발가벗겨 그 이면까지 인간에게 보여준다. 


나의 개입은 

관계속에서 끙끙대는 인간의 갈등을 말씀하게 씻어내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도 하고 

때를 벗겨낼 때가 된 관계는 인생에서 사라지게도 한다. 


내가 사물과 결합할 때엔 

나의 함량을 감사히 여기는 인간에게는 그것의 가치에 무한한 나의 다른 이름 '영원(永遠)'을 선물하지만 

나의 함량을 무시하는 인간에게는 냉정하리만큼 모든 걸 무가치하게 빼앗는 나의 다른 이름, '영면(永眠)'을 건넨다.


협곡과 협곡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마주하며 시간의 위업에 감탄했던 한 청년의 강렬한 표현처럼 

시간은 '마치 신들이 허공에서 떨어뜨린 것 같이(주)' 

이쪽과 저쪽을 연결지어 내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시력(視力)을 시력(時力)으로 승격(昇格)시키지 못한 채

단지 보이는 현상만으로 살아가려면 세상살기가 어지간히 버거울 것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이 신의 공정한 선물을

인생의 정수리에 깊숙하게 침투시킨 채 

결코 어디로도 새나가지 못하도록 차단시킨 인생은

가느다란 향초가 공간의 무게를 장악하듯

자신의 인생을 자기 향으로 깊게 채워 넘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인 우리는 주어진 모든 시간을 부지런하게 다 써야만 하는 것인가? 글쎄... 나는 인간이 부지런하든 나태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모두에게 똑같이 다가가서 얼마나 소중하게 자신을 사용하는지를 볼 뿐. 24시간을 제 아무리 바쁘게 말에 채찍가하며 달린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자와 타닥타닥 걷는 말 등위에서 하늘과 바람과 대지를 바라보며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가는 자...


초점은 

시간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다.     


필자인 나의 생활을 조금 드러내자면, 

나는 시간을 상대로 나를 이동시켜달라 특별한 요청을 한다. 에머슨을 읽는 수동적인 나는 시간을 불러들여 그에게 우격다짐하듯 '당신이 스웨덴보리를 통해 배운 그것을 나에게도 알려달라'고 한다. 어떤 때엔 에머슨 손을 잡고 스웨덴보리를 만나러 간다. 데이빗소로우처럼 살다가 몽테뉴처럼 늙어가고 싶어 시간에 다시 응석을 부렸더니 내 시력(視力)을 차단한 채 승격된 시력(時力)으로 날 그들에게 데려가 주었다. 정말 '신이 허공에서 날 떨어뜨리듯이' 말이다.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에 배심원으로 참여해보기도 하고 케인즈와 러셀, 버지니아 울프가 토론하는 그 현장에 진땀 흘리며 앉아있어도 보고 네로 앞에서 세네카를 대신해 항변하기도 하고 코스톨로니나 벤자민 그레이엄에게 투자의 비법을 알려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여기와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그들과 차마시고 대화하며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간은 물리적인 차원을 초월하여 나를 이리로 저리로 데리고 다닌다.  


시간의 손을 꼭 잡고 있으면 

플라톤의 이데아를 직접 그의 묘사로 들을 수 있고

에머슨의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을 노트할 수 있으며

궁수의 모습을 그리는 파올로코엘뇨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고

사아디의 우화 속의 그 맨발을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나폴레온 힐의 연설장에 내가 청중으로 자리할 수도 있고

마르쿠스아우렐레우스가 도대체 명상록을 어떻게 집필했는지 옆에서 살펴볼 수도 있으며

귀곡자를 만나 직접 그의 처세술을 전수받을 수도 있다.     


달력에 매겨진 연수(年數)나

핸드폰 바탕화면에서 계속 변하는 숫자와 무관하게

나는 차원을 넘나들며 시간을 아끼지 않고 내 맘대로 사용하는데 부지런을 떤다.   


내가 개미처럼 잠자지 않는 생명체도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잠에 빠진 그 때에도

나는 시간에게 제발 머물러 달라 애걸도 한다.     

나와 책 사이에 시간을 투입시켜 시간의 손을 꽉 잡고 있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찬란한 순간의 섬광!

영혼이 빛의 속도로 내게 침투하여 

내가 찾던 그 것을 휘리릭! 던져주며 날 깨워버린다!     

 

내게 붙잡힌 시간을 내 맘대로 요리하는 동안

세상의 시간은 그저 흐르고 있지만 

이는 내 알바 아니니 냅둔다.

그렇게   

시간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움직인다.     


나의 시력(視力)이 시력(時力)이 되고

이 시력(時力)이 지력(知力)으로 승화될 때

나는 내가 원하는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항상 존재할 수 있음을 안다.     

이 연결의 훌륭한 조력자가 책이며

책속으로 시간을 불러들이는 순간,

나의 정신이 초월된 이성과 손잡고 

마법을 부리기 시작한다.              


시간은 내게 오면 

버려지거나 소모, 마모되지 않고 쓰인다고, 재창조된다고, 그렇게 소중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내게 올 때

숫자에 신비한 겉옷을 걸치고서 온다. 화려한 치장으로 날 불편케 하거나 너무 튀는 컬러로 날 민망하게 하지 않고 그저 내 몸에 편하고 자연스레 어울리는, 그런 기운을 입고 오는 듯하다. 

나에게 시간은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 또 다른 무형의 나다. 

그렇게 내 인생은 '시간'이라 이름불리는 또 다른 나와 만나 

숫자로 이어지는 세월이 아닌, 

숫자를 초월하여

시공간을 넘나들며

현실에 발을 붙이게 하는,

입체화된 내 인생의 거대한 건설사업을 함께 일구는

또 다른 나인 것이다.


주> 알랭드보통이 그의 저서 '행복의 건축'에서 사용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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