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독서 5년, 새벽5시발행글쓰기 22개월째
나는 이제 새로운 세상속으로 들어갑니다. 공간이 그대로이고 일상이 그대로인데 뭐가 새로운 세상이냐 하겠지만 나는 그렇습니다. 그대로인 곳에서도 여전히 새로운 현상이 내 인생에 들어올 것이고 새로운 현상에선 새로운 내가 드러날 것입니다. '새로움'이란 '그대로'인 것안에서도 늘 태동합니다.
보다 단단해지는 것,
보다 깊어지는 것,
보다 짙어지는 것,
보다 얇아지는 것,
보다 높아지는 것,
보다 낮추는 것,
보다 높이 바라보는 것,
보다 많이 버리는 것,
보다 거부하지 않는 것,
보다 오래 참는 것,
보다 내지르는 것,
보다 빨라지고
보다 느려지고
보다 섬세해지고
보다 보폭을 넓게 갖는 모든 것들이 새로움입니다.
5에서 6이 되는 것이 왜 새로움이 아닙니까?
5가 FIVE가 되는 것이 왜 새로움이 아닙니까?
5가 55가 되는 것이 왜 새로움이 아니며
5가 0이 되는 것이 왜 새로움이 아닙니까?
5에서 1만큼 새로움이 보태진 6은 새로움입니다.
5가 다른 차원의 언어로 변화된 것은 화학변화를 일으킨 새로움입니다.
5의 1들이 각자 10배씩 불어나 55가 되는 것 역시 5의 부피가 확장된 것이며
5가 자신을 모두 버린 채 스스로 0이 되어도 완벽한 변화를 이룬 새로운 것입니다.
나의 일상은 변함없습니다.
늘 글과 토론, 강의와 코칭이 하루의 주요일상입니다.
하지만 나는 일관된 일상에서 매일 순간순간 변화됩니다.
늘 토론의 내용이 달라지고 글의 양은 불어나고 질은 더 나아지겠지요.
코칭의 내용도 상대와의 결에 따라 변화되며 또 새로운 누군가를 상대로 코칭을 합니다.
매일 그날이 그날같은 일상이라 여기겠지만 매순간이 변화이니 일상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일관된 일상속의 지속적인 변화.
나는 이런 일상이 나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합니다.
나의 하루가 무한한 변화를 수용하는 일관됨을 유지하고
무한한 변화를 거치지만 결코 일관을 포기하지 않는(무변) 일상으로 이루어짐에 감사한 것이지요.
이런 하루가 모여 나의 인생의 결을 다지고 다져진 결로 만들어진 결과가 나의 삶이 된다는 단순논리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삶이란 것이 하나의 방향으로 놓여진 길을 묵묵히 걷는 것일진데 하나의 길 위에서 수많은 변화들을 자신만의 섬세한 감각으로 놓치지 않는 자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작은, 소소한 변화들이 모여 인생의 다채로움을 형성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인생은 얼마나 찬란한 빛이 되어가는 중일까요?
'새벽 5시 발행을 1년 10개월째' 지속하면서 매일 주제와 소재의 한계에 허덕이는 나의 심적 무게감에 요즘은 짓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오늘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끝으로 흘러나오는 겁니다.', '떠올리지 마시고 깊이 관찰한 것들이 차올라 부력에 의해 떠오르게 하십시오'라고 내가 말해버렸습니다.
내가 한 말을 나부터 실천하려니 내가 '글을 써야지!' 주먹 불끈쥐고 글을 쥐어짜내면 안될 것 같았지요. 그저 그 빈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해야할 일상을 보내며 나는 내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나올 것을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저녁 샤워를 마치고서도 나는 내일 발행할 글을 써놓지 못한 지라, 게다가 집필중인 글은 무게감에 눌려 손도 대지 못하는지라, 다소 감정적으로 날 다그치려는 순간, 자연스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책상에 앉게 되었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름의 기준이 생겨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사고에서 벗어나는, 내 사유의 길에 맞지 않는, 내 감각이 거부하는, 나의 이성이 아닌 글은 철저하게 스스로 발행을 금지시키고 있으므로 이 글이 발행될지의 여부를 나는 아직 모릅니다. 글이 완성되면 내일 새벽에 밤새 새로워진 나의 감각과 감정이 발행여부를 결정할테지요.
나는 나에게 철저하여 세상에 누가 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나에게 치밀하여 세상이 내가 낸 구멍으로 애먹지 않게 할 것이며
나는 나에게 집중하여 세상이 흐트러지는 것을 도울 것이며
나는 나에게 강제하여 세상이 나로 하여금 뒤쳐지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아직 미숙한 글이지만 나는 나에게 이러한 기준을 제시하며 나의 창조를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글이 나에게서 빠져나오는 순간, 그 글은 나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으로 흘러가버리니 단어 하나, 의미 하나, 허투루 적어서는 안되지요. 허투루는 세상에 누가 되니까요. 나의 잔재주로 또는 나의 어리석은 두뇌로 해가 되는 인물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을 싸구려취급하는 꼴이니까요.
오늘도 2분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적당히 써', '대충 살아', '있는 돈 쓰면서 누리면서 살아'.
이들은 내가 엄청 열심히 쓰는 줄 아나 봅니다. 대충 안살고 빡쎄게 사는 줄 아나봅니다. 돈이 많은데 못쓰고 있는지 아나봅니다. 다 착각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쓰지 않고 내 안에서 나올 때까지 좀 더 기다리는 새로움을,
나는 빡쎄게 살지 않고 삶을 정교하게 다듬느라 바쁜 새로움을,
나는 돈을 못쓰는 것이 아니라 쓸만큼의 돈이 없어 못 쓰거나, 쓸 곳이 없어 안쓰는 새로움을,
나는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이 아닌 나만의 사유의 길위에서 누리는 새로움을 즐기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나 여유있게 내 시간을 누리면서 내 감정을 즐기면서 내 정신을 운용하면서 내 공간을 점령하면서 내 인생을 놀이터삼아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놀이터에서 놀려면 일정한 규칙을 지켜야 하듯 인생의 놀거리에서도 규칙을 지키는 작은 의무정도로 '열심히 산다'고 한다면 '열심히'라는 단어에 좀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나에게 허락하고 명령합니다.
이 모순의 의미와 실천을 즐기라고!
나는
의 새로운 세상속으로
오늘도 성큼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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