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30분, 우리는 덕유산 남부지소에 도착했다. 송계 계곡이 옆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이곳은 처음 와본 느낌이었다. 지난 5월 2일에 이곳을 왔을 때는 날이 어두워 비를 피해 급히 산에서 내려오느라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을 기억하기 위해 남부지소를 배경으로 인증 사진을 찍고, 송계 계곡을 따라 횡경재로 올라섰다. 계곡을 따라 시원하게 흐르는 물과 함께 어른 한 아름되는 소나무가 향긋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늘 처음 백두대간 종주팀에 합류한 향가을(향기 나는 가을) 님은 긴장해서인지 뒤처졌다. 나 역시 지난번 횡경재에서 송계사 계곡으로 내려왔던 3.2킬로미터의 가파른 산길을 다시 올라야 한다는 부담으로 잔뜩 긴장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오르는 송계사 삼거리에서 횡경재까지는 백두대간 길이 아닌 접속 구간이다. 오늘 산행은 횡경재에서 시작하여 지봉, 달음재, 대봉, 빼재를 거쳐 삼봉산에 올랐다가 내려오고, 소사고개를 지나 대덕산에 올라 덕산재에서 마무리하는 21.15킬로미터의 여정이다. 접속 구간을 포함하면 총 24.35킬로미터가 된다.
우리는 지난 산행 때 1시간 30분 동안 내려왔던 길을 쉼 없이 1시간 15분 만에 올라섰다. 온몸에서 땀이 뿜어져 나왔다. 향가을 님은 차멀미 후유증으로 몹시 지쳐 있었다. 그는 시작부터 "너무 빡센 거 아닌가요?"라며 힘들어했다. 모두 그를 걱정했지만, 후반부에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그의 말에 안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접속 구간에서 지친 것을 안쓰럽게 여겼는지, 지봉, 달음재, 대봉으로 가는 4킬로미터 능선은 부드러웠지만, 어른 키보다 높은 싸리나무가 어깨를 때리고 배낭을 잡아챘다.
산기슭에서 잠깐 보았던 선두 일행은 횡경재에서 길을 잘못 들어 덕유산 주봉 향적봉으로 향한다는 무전을 받았다. 왕복 10.8킬로미터를 알바하고도 선두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걱정보다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들은 후미 그룹보다 2배 이상 빨랐다. 나와 보행 속도가 같아 1구간부터 6구간까지 함께 걸었던 산 벗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향가을 님이 따라오겠지, 하는 생각에 후미 그룹에서 벗어나 내 보행 속도를 찾으려고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산속에 혼자가 되었다. 여러 봉우리와 재를 오르고 내려 대봉에 이르는 동안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믿기지 않았다. 강인한 분이 어떻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머리가 텅 빈 것 같으면서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 나는 도심에 조성된 향토길을 걸으며, 고인이 된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귀와 머리가 윙윙거렸다.
지난 시간, 여러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찧고 까불던 말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그 어떤 대통령이나 정치인보다 훌륭했다. 지역주의를 타파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국민 여러분,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며 생의 단절을 예고하였다.
500만 명이 봉하마을과 전국 각처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하였다. 정부는 분향소를 철거하며 사람들을 전경 차로 봉쇄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성토했고, "역사란 과거와 부단히 싸우며 미래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외쳤다. 슬픈 이야기이고 시대의 비극이다.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으로 믿는다. 2주 전, 국상(國喪) 기간 중 나는 고인이 생전에 남긴 "슬퍼하지 마라. 원망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분은 "내 어머니께서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며 앞서 나가는 것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기득권과 싸웠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했다. 그가 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던 사진들이 떠올랐다. 육신은 한 줌의 재로 사라졌지만, 영혼은 내 가슴 속에 살아있다.
배꼽시계가 밥 달라고 아우성쳤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산 벗들과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제육볶음을 만들어 도시락을 준비했다. 풋고추와 마늘 그리고 고추장이 맛깔스럽게 비닐에 쌓여 있었다. 일행들에게도 맛보라고 덜어주니 “사모님 정성이 대단합니다. 비결이 무엇인가요?”라고 웃으며 물었다.
향적봉까지 알바했던 선두 일행이 내 앞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앞서 나갔다. 나보다 10.8킬로미터를 더 걷고도 앞서 나가고 있다. 대단하다. 후미는 내 뒤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온 산을 되돌아보고 숨을 고르다 보니 산에서 내려서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는 산허리를 베어내 만든 포장도로가 보였다.
빼재, 수령(秀嶺)이라고 쓰인 표석이 서 있었다. 이제야 국립공원 덕유산에서 빠져나왔다. 도로 옆 수로에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식수가 거의 다 떨어져 있었기에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졸졸 흐르는 시멘트 벽면에 물통을 대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산 벗이 나뭇잎을 뜯어 졸졸 흐르는 물에 대니 파이프 역할을 했다. 경험은 대단했다.
향가을 님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함께 왔으니 설사 내가 오늘 산행이 어렵다 해도 같이 가야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보충하고 쉬면서 후미를 기다리니 많이 지친 산 벗들이 나타났다. 향가을 님은 4시간 동안을 쉬지 않고 걸었다며 주저앉았다.
삼봉산으로 올라서는 곳은 급경사의 나무 계단이었다. 향가을 님이 다시 뒤로 처졌다. 함께 있으면 더 힘들 수도 있겠다 싶어 나는 천공 님과 발걸음을 같이하기로 했다. 애칭이 예쁘다. 그들은 무슨 의미로 애칭을 그렇게 정해 이름 대신 부르고 있는 것일까?
빼재에서 삼봉산까지는 4킬로미터였다. 20여 분을 계속 오르니 능선이 펼쳐졌다. 굴참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산바람이 흘러내린 땀을 식혀주었다. 저 멀리 내가 걸어온 산길들이 보였다. 우리는 손 지시봉으로 저곳이 남덕유산인가, 저곳이 오늘 시작한 송계 계곡인가를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눈앞에 거창의 산동네들이 판화처럼 움푹움푹 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삼봉산 바람을 느끼면서 소사고개를 지나 해발 1,290미터의 대덕산에 올랐다. 대덕산은 전북 무주, 경남 거창, 경북 김천시를 경계로 한 웅장하면서 부드러운 산으로 산의 서쪽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금강의 발원지였다. 우리는 산에서 해발 644미터의 덕산재로 내려섰다.
오늘도 산의 기운과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걸어온 길들을 되짚어 보았다. 산에서 얻은 사색과 위로는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산행이 끝나면 지친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줄 새로운 여정을 기다리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7차, 횡경재 - 삼봉산 - 덕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