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20분, 우리는 전북 무주군과 경북 김천시 경계에 있는 덕산재에 도착하자마자 산행을 시작했다. 선두 그룹은 더위가 심해지기 전에 서둘러 포장도로 옆 산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코스는 부항령, 백수리산, 삼도봉, 삼마골재, 밀목령, 석교산(화주봉)을 오르내린 후 우두령까지 가는 총 24.55킬로미터의 일정이다.
30℃ 무더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이온 음료와 얼린 생수를 가득 넣은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해발 740미터의 덕산재에서 부항령까지는 5.3킬로미터, 부항령에서 삼도봉까지는 8.2킬로미터였다. 오후에는 김천시에 비 예보가 있어서, 소나기가 내리기 전에 삼도봉까지 가기 위해 서둘렀다. 급경사를 20여 분 오르니 숨이 턱턱 막혔고,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여성 총무 여왕벌 님은 오늘이 클럽 결성 8개월이 되는 날이며, 8구간을 도전하는 날이라고 했다. 처음엔 낯설었던 회원들이 이제는 가족같이 느껴진다며,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날이 되면 모두 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어제 성포도서관에서 고병헌 교수의 인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그는 성공한 CEO들이 성공의 요인으로 매너를 꼽았다고 말했다. 좋은 매너는 사람과의 좋은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생각났다.
부항령까지 급히 걸어 도착한 후 선두 그룹은 무전을 통해 1시간 10분 만에 5.7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했다. 김정녕 회장은 무전을 듣고서 “개처럼 뛰어갔구나!”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산길에서는 보통, 1시간에 2.5킬로미터를 걷는 것을 고려하면 그들의 속도는 놀라웠다. 하지만, 조금 여유를 가지고 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윤진한 대장은 앞서가는 여성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고, 여성은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며 간다"라고 대답했다. 윤 대장은 "맛있다고 생각하며 걸어보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라인홀트 매스너가 쓴 자전적 에세이 『검은 고독 흰 고독』이 떠올라서 윤 대장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 14좌를 최초로 등반한 라인홀트 매스너는 무산소 단독으로 악명 높은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을 밟으면서, 산에 오르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같다고 하며 “산은 나의 음식”이라고 했다. 높은 산을, 위험을 무릅쓰고 오르는 것이 맛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나무가 하늘로 뻗어 있는 길을 걷다 보니, 몸이 더위에 후끈 달아올랐다. 1시간마다 물을 마시던 나는 이제는 더 자주 물통을 꺼내게 되었다. 오늘 아침은 샌드위치 하나만 먹어서 더 배가 고팠다. 선두를 쫓아가다 보니 다리 근육이 뻐근해지고 몸은 지쳤지만, 산의 매력에 사로잡혀 더욱 나아가고 싶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나는 산행의 즐거움을 다시금 깨달았다.
굴참나무 숲을 지나면서는 햇빛을 가려 시원했지만, 길을 잃을까 봐 긴장했다. '정상에 가려면 제 속도로 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백수리산에서 내 속도를 되찾으며, 급히 가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3시간 이상 걸은 다리가 이제 그만 쉬자고 보챘다. 십여 명이 펼친 점심 밥상에는 상추, 고추, 마늘, 오이, 김, 김치 등 반찬이 다양했다. 아내는 오늘도 곤한 몸을 일으켜 고추장을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다.
1,170봉을 찍고 능선을 따라 걷다 보니 나무 계단이 앙증맞게 앉아 있었다. 야생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 계단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색 야생초와 나리꽃이 예쁘다.
삼도봉에 도착했다. 삼도봉은 충청북도, 경상북도, 전라북도가 만나는 지점으로, 영동군, 김천시, 무주군이 함께하는 곳이다. 이곳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만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지역주의를 타파하려 애썼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떠올렸다. 그는 원칙을 지키려 했고 기득권과 부당함에 대항해 싸웠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49일이 되는 날이 다가오며, 그의 정신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성공회대 고 교수는 “원칙이 있는 사회에서 원칙적인 사람은 오히려 왕따를 당한다.”라고 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많은 사람은 삼도봉에서 민주지산으로 향했으나, 우리는 삼마골재를 거쳐 밀목령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밀목령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고, 나뭇가지와 벌레에 시달렸다. 우거진 숲속에 위험지역 주의 안내판이 보였고, 폐광지역으로 지반이 불안정하니 이동 간격을 유지하라는 경고가 있었다. 밀목령에 다다랐을 때 포성이 들려 군부대가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며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모두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1,207미터의 석교산 정상에 도착했으나,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우두령으로 향했다. 길이 험난하고 미끄러웠지만, 석교산 운해를 감상하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빠져 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산자락으로 내려서는 느낌이 든다. 거세게 퍼붓던 소나기가 잦아들었다. 서둘러 걸음 한 덕분에 앞서갔던 산 벗들을 만났는데 그들도 힘들어 보였다. 점심 먹은 후 앉아 있지 못했으니, 몸은 파김치였으나 눈은 길에 고정되어 있다. 자칫 딴청을 부리면 미끄러운 길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 점점 내려가는 길이 급해졌다. 앞선 자들의 발자국이 선명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바닥에 힘쓴 자취가 남아있었다. 안간힘을 쓰며 잡았던 나무가 휘어져 있다.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으려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우두령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소하고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세워진 상징물이 눈길을 끈다. 예전에는 우등령(소의 등)이라고 불렀는데 구전되어 우두령이라고 하고 질매재라고도 부른다. 해발 720미터의 우두령(牛頭嶺)은 경북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을 연결하는 분수령으로 낙동강과 금강수계의 발원지이다.
우두령에 도착하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몸은 땀과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고, 산속에서 9시간 20분을 보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먼저 내려온 산 벗들이 반겨주었고, 내려오지 않은 벗들을 돕기 위해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선두 그룹의 모습이 고마웠다. (8차, 덕산재 - 석교산 - 우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