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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호 Aug 10. 2024

행동하는 양심을 생각하며

오전 8시, 우리는 추풍령 공원에 서 있는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나무 계단을 터벅터벅 밟으며 산으로 올랐다. 오늘의 산행은 금산을 거쳐 용문산과 국수봉을 지나 큰재를 날머리로 하는 19.67킬로미터의 여정이다.     

산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지난 8월 1일 우두령에서 이곳까지 산행할 때도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가 한낮에는 펄펄 끓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오늘도 날씨가 걱정되었다. 처서가 지났는데도 한낮의 햇빛은 따갑기만 했다. 온난화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보전해야 하는데, 경제발전이라는 핑계로 자연을 훼손한 대가일 것이다.     

며칠 후 금수산 산악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선두 십여 명은 3시간을 목표로 산행한다고 잔뜩 벼르며 스트레칭도 하지 않은 채 산으로 들어섰다. 발걸음이 비슷한 십여 명의 후미는 이제는 느긋하기만 했다. 그동안 24킬로미터 이상씩 걸어온 길에 비해 오늘 산행 거리가 짧고 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여 분을 올랐을까, 온몸에서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개미 한 마리가 어디로 가는지 더듬이를 쫑긋 세우고는 발걸음을 급히 옮기고 있었다. 녀석은 아침 일찍 어디를 홀로 가는 것일까? 어렸을 때 장난으로 개미집을 헐고, 아무 생각 없이 개미를 밟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성장하면서 인간과 개미의 관계처럼, 우리보다 몇천 배 큰 괴물이 산 위에서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며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무리를 이루고 사는 생물 중 하나를 꼽으라면, 원자폭탄에서도 살아남은 개미가 있다. 개미가 존재했던 시기가 1억 년 전이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개미들은 오랫동안 땅 밑에 삶의 터전을 짓고, 그들의 몸보다 60배나 더 큰 도마뱀을 죽여 먹이를 옮기기도 한다.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개미는 수천 마리의 수개미가 암개미 한 마리와 짝짓기를 시도한다. 날짐승들에게 잡아먹히고 결국 십여 마리만 생존하여 거대집단을 만든다는 것을 인간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은 비록 미물이지만, 그렇게 생존하여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의 천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개미」는 인간과 개미와의 의사소통을 통한 생존의 투쟁을 다룬 소설이다. 인간이 보기에 미물인 개미는 인간과 의사소통은 안 되지만, 자기들의 존재 인정받기를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지막한 금산을 휘돌아 내려갔다가 다시 산으로 몇 차례 올라서고, 임도와 산길을 만난 후 경북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을 경계로 하는 작점고개로 내려섰다. 10시 30분밖에 안 되었는데, 아침 식사로 토스트를 먹은 배가 밥 달라고 아우성쳤다. 점심시간이 이르다고 산 벗들은 우리 앞으로 뛰쳐나가고, 후미를 자청한 여덟 명은 능치 쉼터에서 배낭을 풀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쉼터에서 도시락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평한 곳에서 다리를 쭉 펴고 먹는 점심은 솔잎을 깔고 앉았던 그동안의 점심과 달리 편안했다.     

편안함에 길든 몸이 쉼터에서 더 머무르기를 원했지만,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길이니, 안주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이른 점심을 먹어서 거북스러운 배를 다스리려고 천천히 용문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혼자의 시간을 만들었다.     

지난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께서 여든다섯의 일기로 영면하셨다. 고인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일구고 한반도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열망하셨다. 평생 빨갱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여러 차례 죽음과 고초를 물리쳤던 당신을 많은 사람은 인동초라 불렀다. 인동초는 겨울철에도 말라 죽지 않고 푸른 잎을 띄며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그러나 ‘행동하는 양심’을 주창한 당신께서도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난 5월, 서거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에서 흐느껴 울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당신의 육체 반쪽이 허물어지는 심정이었고, 그 충격은 어쩌면 불과 100여 일도 안 되어 당신의 반쪽마저 허물어지지 않았나 싶다. 생전에 당신께서 좋은 시라고 했던 정현종 시인의 <섬>을 읊조려 본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의 전문)  

   

상념에 젖어있던 내게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숲속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줄기에 매달려 있던 도토리가 허물을 벗고 삭발한 채로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람쥐 밥을 주워서 묵을 만들어 먹는다. 그래서 다람쥐가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 법으로 도토리 주워가는 것을 규제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눈을 피해 동물의 밥을 훔치고 있다. 이곳은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산길에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가끔 파헤쳐진 산길이 보였다. 멧돼지가 쑤셔놓은 흔적이다. 농민들이 피해를 많이 입어 2007년 한시적으로 멧돼지를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지역을 한정하여 저녁 10시까지 사냥할 수 있도록 하다 보니, 새벽에 멧돼지가 먹을 것을 찾아 산을 쑤셔놓고 마을에까지 내려와 고구마, 감자 등을 먹어 치운다.     

멧돼지뿐만 아니라 고라니와 청설모까지 합세하고 있다고 한다. 동물들이 사람 밥을 강탈하고 있다. 야생 보호법으로 동물들을 보호하다 보니 개체수가 증가한 결과이다. 동물 보호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도토리나무 숲을 따라 오르내리다 보니 해발 710미터 낮은 곳에 용문산이 있었다. 선두 그룹은 오늘도 이미 산행을 마쳤지만, 우리는 여유롭게 쉬었다 가기로 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구불구불하다. 멀리도 잘 왔다. 해발 710미터의 국수봉에서 올려다본 하늘이 높고 구름은 솜이불 같았다. 처서도 지났고 서리가 내린다는 백로가 모레 아닌가. 절기는 속일 수 없다고 어른들께서 말씀하시곤 했는데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상주 시내가 또렷이 보였다. 이 좋은 계절과 시간에 내가 자연과 함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다. 나도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걸 보면 이제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오후 3시 10분에 금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큰재(우하재)로 내려왔다. 폐교된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의 수돗가에서 등목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렇듯 추풍령에서 큰재까지의 여정은 안개 속에서 시작하여 더위와 싸우며, 개미와 도토리, 멧돼지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상념과 함께, 자연 속에서의 나는 평화와 조화를 찾으려 노력했다. 이 길을 걸으며 얻은 깨달음과 성찰은 앞으로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10차, 금산 - 용문산 - 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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