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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호 Aug 11. 2024

나와의 약속

오늘 산행은 상주시 공성면 신곡리에 있는 큰재에서 출발하여 개터재, 백학산(백화산), 개머리재, 지기재를 거쳐 신의터재로 내려오는 24.47킬로미터의 일정이었다.     

전국적으로 비가 예보되어 우의를 배낭에서 꺼냈다가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결국 비에 대비해 우의를 챙겼고, 배낭은 우의와 여벌 옷으로 인해 불룩해졌다.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을 지나며 산행을 시작했다. 안개로 인해 주변이 흐릿하게 보였다. 오늘 오를 산의 최고봉은 해발 615미터의 백학산이었다.     

이번 산행에는 스물네 명이 함께했다. 무리한 산행으로 무릎과 발목을 다친 사람들, 그리고 내일 중앙 서울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러너들, 애경사로 참석하지 못한 산 벗들로 인해 인원이 줄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의욕적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9월 5일 이후 두 달 만에 만난 산 벗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오늘도 후미를 맡은 김 회장과 함께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10월의 마지막 날, 산에는 가을의 흔적이 가득했다. 노란 단풍이 발걸음을 붙잡고, 산의 냄새는 시큼하면서도 상쾌했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배움을 준다. 사람은 땅에서 배우고(人法地), 땅은 하늘에서 배우며(地法天), 하늘은 도리에서 배우고(天法道), 도리는 자연에서 배운다(道法自然). 이처럼 자연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여유를 선사한다.     

큰재에서 개터재까지 5.65킬로미터, 개터재에서 백학산까지 6.87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낙엽을 밟는 소리가 어머니가 콩을 까던 소리처럼 들렸다. 사람과 자연에 관해 이야기하며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에 취하다 보니, 땀 흘리는 것도 잊은 채 어느새 백학산에 다다랐다. 걷다 보면 가끔 일행과 떨어져 혼자 산길을 걷게 된다. 그럴 때면 내 삶을 돌아보곤 한다.     

올해로 공직 생활 29년 차에 접어들었다. 머리카락은 어느덧 희끗희끗해졌고, 내 아이들은 성년이 되었다. 올해는 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을 떠올리며 하늘을 처음 만나는 새처럼, 땅을 처음 뚫는 새싹처럼, 공직에 처음 들어온 새내기처럼 살고자 했다. 산은 고요함을 넘어 고즈넉함 그 자체였다.     

올해 내가 이루고자 했던 계획들이 얼마나 실행되었는지 되돌아보았다. 나는 매년 대하소설 한 질을 읽기로 하고 있는데, 내년이 국권 피탈(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해라 올해는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읽기로 했었다. 두 번째 계획은 2003년 선친 기제사로 일부 완주하지 못했던 국토 종단을 마무리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마라톤을 여덟 번 완주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올해 사무관 승진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는 내 의지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승진은 내 의지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올해 계획한 것들을 대부분 이루었고, 마라톤도 현재 진행형으로 11월에 여덟 번째 완주를 계획하고 있다. 백두대간 종주도 어느새 11구간에 접어들었다. 나는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만족을 느낀다.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다는 말이 있다. 내년에는 또 무엇을 실행해 볼까,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내년은 국권 피탈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 대표 33인을 기리는 마음으로 풀코스를 33회 완주해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내년에는 열네 번을 완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력과 자기 관리가 필수다. 나는 내년 이맘때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점심시간은 언제나처럼 여유로웠다. 철 지난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아삭하게 씹어 먹으며, 내 반찬도 산 벗들에게 나누어 주며 피로를 풀었다.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해 3시간 만에 이곳까지 도착했으니, 날머리인 신의터재까지는 4시간이면 족히 도착할 것 같았다. 산 벗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백학산에서 개머리재까지 4.7킬로미터, 지기재를 거쳐 신의터재까지는 12킬로미터였다. 전나무가 하늘로 뻗어 있고 도토리가 떨어진 오솔길을 걸으며 최근 읽은 조신영 작가의 『경청』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수첩에 적어 놓은 '경청을 실천하기 위한 다섯 가지 행동 가이드(공감을 준비하자. 상대를 인정하자. 말하기를 절제하자. 겸손하게 이해하자. 온몸으로 응답하자)'가 있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려운 것 같다. 신문 광고에서 본 ‘여보, 청와대에 보청기 사드려야겠어요’라는 문구가 생각나 실실 웃음이 났다.     

산자락의 과수원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와 주렁주렁 열린 사과가 햇볕을 받으며 반짝이는 풍경은 오후의 나른함을 잊게 했다. 사과를 선별하는 손길과 아직 베지 못한 논의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에서 태풍 없는 가을의 풍요로움과 함께 농부들의 고단함도 느껴졌다.     

일주일 전 남도 지역을 도보 여행하며 보았던 정부의 추곡 수매 촉구 현수막과 가을걷이가 끝난 후 텃밭에 검불을 모아 불을 지피던 촌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풍년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쌀값과 과일 가격 때문에 농부들의 한숨이 깊어진 현실이 이 가을 산자락 과수원에서 느껴졌다. 마을의 일상을 바라보며 자연 속에서의 산행이 주는 깊은 생각과 성찰은 계속되었다.     

이번 상주시 큰재에서 신의터재까지의 산행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과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11차, 큰재 - 백학산 - 신의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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