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한 장 남았다. 기축년의 끝자락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앞으로 다가올 새해에는 무엇을 할지 생각하게 되는 시기다. 비는 늦은 밤에 오지 않았지만, 새벽에 내렸다. 비가 그치고 나면 추워질 것이다.
아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막고, 이것저것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가랑비가 내리는 거리는 적막했다. 새벽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뭔가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고, 모든 것이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밤티재였다. 12구간을 갈령에서 마쳤으니, 백두대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형제봉과 천왕봉에 올라야 했지만, 산불 예방 때문에 통제되어서 역순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오늘은 밤티재에서 시작해 문장대, 신선대, 입석대를 지나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오르고, 형제봉을 거쳐 갈령으로 내려가는 18.56킬로미터의 코스다.
보은에 도착할 즈음 비가 멈추고 하늘이 맑아졌다. 하지만 밤티재에 도착하자 바람이 세게 불고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야호! 신난다!" 저마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산을 보고 들떠 외쳤다. 비 예보에 우의만 챙기고, 아이젠과 스패츠를 준비하지 않은 나는 "오늘 죽었다!"며 신음을 내뱉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속리산은 1970년에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충북 보은과 괴산, 경북 상주에 걸쳐 있는 이 산은 금강, 한강, 낙동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가진 이 산은 험준한 산세와 거친 바람으로 오늘도 이방인들의 접근을 금지하려는 듯했다. 새해를 맞이하는 첫눈이었지만 그 위력은 대단했다. 눈발이 얼굴을 때리며 나무가 푹 뒤집어쓴 모자를 벗기고 배낭을 부여잡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온 천지가 은빛이었다. 설경이 장관을 이루었고,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문장대를 오르는 중턱에서 바위 능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를 오르는 일행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밧줄을 놓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이 식어 몸이 차가워졌다. 오늘 처음 합류한 일곱 명 중 여성 세 명은 후미로 쳐졌다. 나는 겨울 바위산을 두려워한다. 6년 전 수락산 독수리 바위에서 큰 사고를 당할 뻔한 기억이 떠올랐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바위를 넘었지만, 또 다른 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를 내려갈 때는 배낭과 스틱을 던져놓고 네발로 기어서 내려갔다. 마지막 바위를 앞두고 길이 끊긴 것을 알았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나아가는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어렵게 이곳까지 왔지만, 제 길을 찾아 돌아서야 했다.
바위틈 사이로 낮게 몸을 숙이고 지나갈 수 있는 곳이 보였다. 낑낑대며 바위를 빠져나가니 이번에는 바위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야 했다. 다리가 떨렸다. 3시간이 지나서야 하늘과 눈으로 덮인 산세가 보였다. 안개가 껴 시야가 좋지 않았지만, 발길은 문장대를 향했다. 해발 1,033미터의 문장대는 구름 속에 묻혀 있는 모습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신선대에 도착해 점심을 먹기 위해 대피소로 들어갔다. 대피소는 산행객들로 가득했다. 이판사판 님이 건네준 컵라면 국물을 마시니 얼었던 몸이 녹았다. 오늘 처음 합류한 사람들은 대피소를 지나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밥을 먹은 후 포만감을 느끼며 무채색 산세를 바라보는 시간은 여유로웠다. 함께 산을 오르며 두려움을 이겨냈던 산 벗들도 이제는 눈을 뿌리며 엉덩이로 미끄럼을 타며 즐기고 있었다.
드디어 속리산 정상, 해발 1,058미터의 천왕봉에 도착했다. 그러나 지도에는 천황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오래전 올랐던 영암의 월출산 최고봉도 천황봉이라고 불렸었다. 나는 산행하면서 군청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군청은 원래 천황봉이라는 궁색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재약산의 최고봉은 사자봉인데, 표지판에는 천황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참으로 우울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는 한반도의 정기를 끊으려고 많은 산에 쇠말뚝을 박았고, 우리는 해방 후에도 그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기득권층으로 행세하는 친일 세력들은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는 '호구 협력론'을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대한제국인이 모두 일본의 제도와 법률하에서 살았기 때문에 모든 이가 죄인이라는 '전 민족 공범론'도 내세웠다. 현재 한국 자본주의 발전은 일제 강점기에 자본이 투입된 결과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 열사들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산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속리산 신령이시여!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내년은 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올해 『친일 인명사전』이 간행되어 친일 문제를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 산하에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우리 주변의 일제 잔재를 정리해야 할 때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올해도 많은 일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선종하셨다.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많은 목소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용산 참사로 경찰관 한 명과 철거민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1년이 지나도록 아직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다. 집을 잃어본 사람들은 용산 참사를 그저 흘려보낼 수 없을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는 최근 '작가 모임'에서 발간한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 역입니다.』에서 "오늘 이 땅에서 행복해하는 사람은 도둑 아니면 바보일 것"이라며 "이 책은 이성의 힘으로 캄캄한 죽임의 시대를 증거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생생한 양심의 기록"이라고 썼다.
천왕봉에서 갈령까지는 6.6킬로미터. 능선을 타고 2시간 이상 내려가야 한다.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능선으로 몰아치며 얼굴을 할퀴고 눈보라가 일었다. 잠시 눈을 들어보니 은빛 나무가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눈옷을 입고 있어 마치 백두산의 자작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자작나무숲은 겨울의 정직함을 드러낸다. 그 나무들은 오지 못한 이들까지도 품어주는 듯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시인 고은은 「자작나무숲으로 가서」라는 시에서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았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돌아보니, 기축년은 익숙한 것들을 버리면서 마라톤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나를 찾기 위해 도보 여행을 떠났던 한 해였다.
능선을 따라 3시간을 내려왔을 즈음 형제봉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에서 갈령까지는 2킬로미터. 해발 832미터의 형제봉에서 갈령 삼거리까지의 700미터는 경사가 급했다. 풀어진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내려왔다.
갈령 표석이 우뚝 서 있다. 내일은 더욱 추워질 것처럼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오전 8시에 올라 오후 5시까지 머물렀던 산은 두렵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속리산 신령이시여! 왔다가 갑니다." (13차, 밤티재 - 속리산 - 갈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