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밤티재에 도착했다. 이곳은 나에게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기에, 과거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2009년 12월에는 갈령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밤티재에서 산행을 시작했고, 2010년 1월 2일에는 늘재로 가던 중 백두대간이 아닌 백악산으로 잘못 들어선 적이 있다. 오늘의 산행은 밤티재에서 출발해 늘재를 지나 청화산과 조항산을 오른 후 밀재를 거쳐 대야산에 오르고 버리미기재로 내려가는 20.79킬로미터의 긴 여정이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침 최저 기온은 영하 13도까지 떨어져 매서운 추위가 느껴졌다. 산기슭으로 들어서자, 공원 관리자가 나타나 통제 구간이라며 과태료 50만 원을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늘재로 가려고 버스에 올랐으나, 몇몇은 아쉬워하며 탑승하지 않았다. 나는 새벽까지 마신 술 때문에 정신이 몽롱하여 거리가 줄어든 것이 은근히 반가웠다.
늘재에 도착하자 백두대간을 알리는 큰 표석이 우리를 맞이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가파른 경사에 금세 숨이 찼고, 어제의 음주가 더해져 몸이 무거웠다.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속에서 멀리 속리산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청화산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정국기원, 백의민족 민족중흥 성지'라는 표석이 서 있었다. 지난해부터 나라 안팎은 세종시, 4대강 사업, 미디어법, 노동조합 문제 등으로 어수선했지만, 나는 산속에서 자연과 마주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2.49킬로미터를 올라 도착한 해발 970미터의 청화산 정상에서는 속리산과 덕유산 향적봉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청화산에서 조항산으로 가는 4.85킬로미터의 산길에는 갓바위재와 전망 바위가 있었다. 바위와 바위를 이은 밧줄을 의지해 산을 타며 해발 953.6미터의 조항산 정상에 올랐다.
멀리 금강산 만물상처럼 생긴 바위들이 보였고, 안내 지도에는 고모치 광산이라 표시된 채석장이 있었다. 백두대간을 깎아낸 채 방치된 채석장을 보며, 나라의 기운이 제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 걱정이 스쳤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었다.
의상저수지는 꽁꽁 얼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밧줄에 의지해 바위에서 내려오니 바람이 잦아들고 따뜻한 햇살이 느껴졌다. 한쪽은 아직 겨울이었지만, 다른 쪽은 봄이 온 듯했다.
후미를 맡은 이석한 산악 대장은 후미를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후미에 있던 여덟 명이 도착해 함께 식사하고, 커피 한 잔으로 여유를 즐겼다. 선두는 이미 우리보다 4킬로미터 앞서 밀재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후미는 언제나 선두를 쫓아가기 위해 바쁘지만, 그 속에서도 느긋함이 있었다.
산 능선은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를 가르고 있었다. 고모치를 지나자, 조항산 정상에서 보았던 마귀 할미바위가 우리 발걸음을 붙잡았다. 대문 바위 표지판에는 소요 시간이 적혀 있었지만, 각자의 걸음 속도는 제각각이었다.
바위 앞에서는 스틱을 접어 배낭에 꽂고, 릿지로 바위를 타거나 네발로 기어야 했다. 그늘진 곳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빙판이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2월부터 3월까지의 산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녹은 땅이 등산화에 흙을 묻히게 하고, 그 밑은 미끄러워서였다.
낙엽이 빙판을 덮고 있어 가끔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눈과 빙판이 있는 곳에서는 아이젠을 착용했다가, 눈이 녹은 곳에서는 다시 벗어야 했다. 최근 산행 중 미끄러져 다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산에 오를 때 더욱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발 930미터의 대야산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멋졌다. 땀을 흘리며 오른 보람이 느껴졌다. 멀리 조항산이 보였고, 오늘 걸어온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대야산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더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 지나니, 청화산과 조항산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졌다.
멀리서 희양산이 손짓하는 듯했다. 대야산에 홀로 올라온 한 젊은 등산객은 150미터의 수직 빙판길을 밧줄에 의지해 올라왔다며, 이쪽으로 내려가려면 힘이 필요하다며 아이젠 착용을 권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거의 죽다 살아난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는 밀재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후미에 있던 아홉 명은 긴장하며 아이젠을 착용하고 천천히 하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젊은 등산객이 말했던 그 위험한 곳은 나타나지 않았고, 비탈길에서는 흙먼지가 날렸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바위를 디디니 발목이 시큰거렸다. "이런 젠장,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조심하라고만 했어도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곳곳에 빙판이 이어졌고, 밧줄은 군데군데 나무에 매여 있었다.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두 사람이 올라오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이젠 착용하지 않아도 괜찮나요?"라는 내 물음에 그들은 숨을 몰아쉬며 "착용하셔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높은 산에서 내려가는 길이 쉽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물 흐르던 계곡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밧줄에 의지하며 내려가다 보니 어깨가 저리고, 아이젠을 착용한 발이 뻐근해졌다. 얼음을 깎아내는 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1시간 이상을 내려오니, 밀재에서 내려온 길과 만나는 월령대 표지판이 보였다. 그 아래로 용추계곡이 이어져 있었다. 계곡은 산의 높이만큼 깊어 보였다.
까마귀가 조항산과 대야산에서 계속해서 울어댔다. 지난해 12월 한라산 영실코스를 오를 때, 주목 위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까옥’하며 산을 울리며 하늘로 날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까마귀는 나를 보고 놀란 듯했고, 나는 까마귀가 놀란 듯 울며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놀랐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를 흉조로, 까치를 길조로 여겨왔지만, 요즘에는 그 역할이 뒤바뀌었다. 까치는 시골집 마당 감나무에서 감을 독차지하며 울어대면 기쁜 일이 있을 거라 여겼지만, 이제는 까치가 오히려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었고, 까마귀가 유익한 새로 재평가되었다. 까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오며 울었다.
산에서 1시간 이상 내려오자, 계곡 맞은편으로 잘 닦인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그곳은 대야산 휴양림 관리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아침에 회장이 알려준 대로 포장도로를 따라 20여 분을 걸어야 했다. 윗길에서 도로로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은 등산클럽의 김정녕 회장이었다.
우리는 대야산 정상에서 백두대간 코스를 이탈해 용추계곡으로 잘못 내려온 것이었다. 너무 지쳐 백두대간 코스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무작정 산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렇게 9시간을 산에서 보낸 후, 떡국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켜니 온몸이 풀렸다. 김 회장은 웃으며, 대간 길을 이탈해 엉뚱한 길로 내려온 사람들에게는 백두대간 종주 완주증을 줄 수 없다고 농담을 던졌다. 나는 대야산 정상 이후 찍은 사진이 있으면 내놓아 보라고 하며 껄껄 웃었다.
대야산 정상부터 버리미기재 구간에서 사진을 찍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내 말에 산 친구들은 파안대소했다. 후미 때문에 오늘 안산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질까 봐 걱정했지만, 예정 시간에 산행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밤티재 구간의 뒷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뒷이야기
2010년 1월 2일, 밤티재부터 늘재로 산행하던 중, 눈 덮인 산에서 선두를 따라 백악산으로 잘못 들어섰었다. 점심을 먹은 후 늘재까지 가려 했으나, 비가 내려 계획을 접었다. 2010년 2월 6일, 늘재로 가기 위해 밤티재에서 산을 오르다 공원 관리인에게 제지당했다.
산 벗 일부는 그 구간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3.3킬로미터의 산행에는 1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고, 대야산 정상에서 버리미기재까지의 험난한 구간을 생각하면, 1월 2일 백악산으로 잘못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비를 맞으며 대야산까지 험한 구간을 진행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원 관리인에게 제지당하지 않았다면 3.3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했으므로, 저녁 6시 이후 야간 산행으로 인한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일련의 과정이 안산 백두대간 종주 클럽이 백두대간을 완주할 수 있도록 하늘이 도와준 것으로 생각했다. (14차, 밤티재 - 대야산 - 버리미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