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에 대야산 주차장에 도착해 산신제를 지내며, 2008년 12월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며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되돌아봤다. 중단 없이 이곳까지 온 것이 기쁘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의 여정은 장성봉과 악휘봉을 지나 은티재로 내려가서 주치봉과 구왕봉을 거쳐 희양산에 오르는 18.79킬로미터의 산행이다. 은티마을까지 2.9킬로미터의 접속 구간을 포함하면 총 21.69킬로미터가 된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장성봉으로 오르는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산에 오르기 시작하니 가파른 경사가 이어졌다. 봄이 왔지만, 산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여 등산화를 덮었다. 장성봉 중턱에 오르자,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아 발이 미끄러져 오르기가 어려웠고, 하얀 안개가 내려 앞을 가렸다.
1951년 지리산과 소백산맥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태(본명 이우태, 제6대 국회의원)가 쓴 자전적 소설 『남부군』이 떠올랐다. 반세기가 지난 실화인데, 경제적, 물질적으로 어려웠던 1950년대의 춥고 눈 쌓인 겨울에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산을 오르며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태는 빨치산들이 얼어 죽고, 배고파 죽고, 얻어맞아 죽었다고 했다. 군경 수색대에 쫓겼을 당시 그들은 세 가지 금기사항을 지켜야 했다. 추운 날씨에도 절대 불을 피우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 못하며, 능선 길을 걷지 못했다. 닳아버린 고무신을 전깃줄로 동여맨 채 수색대를 피했던 빨치산들과 그들을 쫓았던 군경 수색대의 이야기는 암울하고 가슴 아픈 한민족의 역사였다. 그들의 주 활동 무대가 지리산과 소백산맥이었으니, 어쩌면 아직 이곳에도 그들의 원혼이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
쉼 없이 걸은 발이 힘들어했지만, 산에는 마땅히 쉴 곳이 없었다. 어느덧 장성봉에 도착했다. 오늘은 직장 동료 네 명이 함께했다. 우리는 말없이 걸으며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혼자 걷다가 어느덧 발걸음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였다. 우리는 악휘봉으로 오르는 곳까지 2시간을 걸었다.
산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산신제를 지내고 먹은 시루떡과 초콜릿을 먹은 배가 밥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미로 바위를 지나 오른 곳에는 여러 사람이 앉을 자리가 있었다. 저 멀리 희양산이 흰옷을 입고 운해를 껴안고 있었다. 대야산에서 버리미기재로 내려갔던 곳보다는 덜하지만, 희양산으로 오르는 절벽도 무척 험할 것이다.
1994년 백두대간을 단독 종주한 길춘일이 쓴 『71일간의 백두대간』에는 "희양산 오르는 절벽이 위험"하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전문 산악인이 5, 6월쯤 올라도 힘들다고 했는데, 오늘은 눈이 내려 밧줄이 젖어 있고 노면은 빙판이 되어 더욱 위험할 것 같아 몸이 긴장되었다.
희양산은 해발 998미터로,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맥의 한 줄기이다. 이 산은 동, 서, 남쪽의 3면이 화강암으로 덮여 있어 험준한 산세가 특징이다. 중턱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나오는 형상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는 이 산의 독특한 매력을 한층 더해 준다.
헉헉대며 올라선 곳은 구왕봉이었다. 봉우리를 오르는 길에는 바위가 없었지만 가팔랐다. 20여 분 걸으면 은티마을에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었지만, 나는 지름치재로 발길을 향했다. 다른 바위들은 몇 미터 정도 로프를 타고 내려가거나 오르면 되었는데, 이곳은 계속 로프가 이어져 있었다. 젖은 로프는 장갑을 물걸레로 만들었다. 잠시 발 디딜 곳을 찾아 장갑을 벗어 짜내니 줄줄 물이 흘러내렸다.
희양산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봉암사라는 절이 있었다. 스님들이 참선에 방해된다며 오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절벽은 그곳을 오르려는 사람들에게 사전 경고를 주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밧줄을 잡은 팔이 뻐근해졌다. 놓치면 그대로 절벽으로 떨어져 몸을 다칠 것이다. 꽉 잡아야 했다. 발목에 채워져 있던 아이젠이 바위에서 미끄러져 밑으로 떨어졌다. 밧줄을 잡고 오르기는 했지만, 빙판 절벽에서 아이젠이 없으면 위험하다. 다행히 10미터 아래에 있던 일행이 올라오고 있어 부탁할 수 있었다. 빙판에서 아이젠은 생명줄이라는 것을 느꼈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올라서니 앞서갔던 동료들이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우리는 희양산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바닥에 깔린 클럽 안내 표지판을 보고 배너미평전으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너미평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구릉을 넘고 내려서기를 반복해야 했다. 이제 다 왔나 싶으면 또다시 언덕과 봉우리가 나왔다.
일행이 내 뒤를 바짝 쫓아오면서 무섭다고 했다. 무엇이 무섭냐고 물으니, 바람따라 님은 혼자 있을 때 짐승이 무섭다고 하고, 코스모스 님은 사람이 무섭다고 했다. 사람보다 무서운 존재가 있을까.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해 사람을 속이고 짓밟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무섭다고 했다.
백두대간을 왜 타는지 서로 물었다. 저마다 백두대간을 생각하는 것이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남들이 잘 찾지 않는 산을 타는 매력 때문에 등산클럽에 나온다고 했지만, 나는 백두대간이 한반도, 한민족의 등뼈라고 생각하고 있고, 내가 걸으며 삶을 느껴봐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배너미평전에 도착하니 계곡물 소리가 들렸다. 꽤 높은 곳인데도 이곳에서부터 겨우내 얼었던 물이 녹아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오르는 구간이 없다. 계속 내려가면 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내려가는 계곡은 참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여 푹신했지만, 비탈진 곳에서는 자칫 미끄러지기 쉽다. 은티마을까지 2.9킬로미터는 지친 몸을 더욱 지치게 했다.
산자락에 은티마을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은티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400년 된 소나무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이 나무들은 지하여장군, 천하대장군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들이다. 당산나무는 그 마을의 뿌리 깊은 역사를 상징한다. 수많은 세월 동안 마을을 지켜온 이 나무들은 그 자체로 역사의 증인이다.
일제는 이러한 당산나무를 민족의 혼과 얼을 빼앗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자르게 했다. 목숨을 걸고 당산나무를 지키려 했던 이들의 모습은 지금도 소나무의 당당한 자태로 남아 있다. 올해는 일제강점기를 겪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은티마을 입구에 당당히 서 있는 당산나무에서 그동안 지켜온 우리 민족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15차, 장성봉 - 희양산 - 배너미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