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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호 Aug 16. 2024

삶이라는 여행 가방

이른 아침 6시, 이우릿재(이화령)에 도착했다. 맑은 날씨 아래, 겨울의 긴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지난 3월, 배너미평전에서 은티마을까지 내려왔던 2.9킬로미터의 길을 다시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아, 우리는 북진 대신 남진을 선택했고, 그리하여 이우릿재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우릿재는 해발 580미터로,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의 경계에 있는 곳이다. 큰 표석이 그 경계를 알리고 있었다. 우리는 산의 방향을 가늠하며 조령산의 반대쪽으로 길을 잡았다. 시작부터 가파른 산자락을 40여 분 동안 힘겹게 올라간 곳은 해발 673미터의 조봉이었다. 조봉에 오르니, 산새와 까마귀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오늘의 산행 거리는 접속 구간을 포함해 17.45킬로미터에 달했다. 이우릿재에서 출발해 조봉, 황학산, 백화산, 평전치, 사다리재, 이만봉을 거쳐 배너미평전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여기서 다시 은티마을까지 2.9킬로미터를 더 가야 한다.      

황학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하늘로 높이 솟은 낙엽송이 줄지어 있었다. 4월이었지만 아직 잔설이 남아 있었고,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이라 날씨는 차가웠다. 나무에 새순이 돋지 않은 산자락에서는 봄기운이 느껴졌지만, 몸은 여전히 옷깃을 여미게 했다.     

산행 중, 바람따라님이 백골사단에서 복무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 남자들이 만나면 으레 군대 생활 이야기를 하게 마련인데, 특히 군대에서 축구했던 추억이 자주 떠오른다. 한반도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며 반세기 넘게 남과 북이 갈라져 평화협정 대신 휴전협정을 맺고 있는 현실이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306 보충대에 입대를 앞둔 아들은 불안과 초조함에 휩싸여 있었다. 대학을 휴학한 후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이어가던 아들은 군대 입대 전 훈련소에서 선착순을 하게 될 거라며 체력을 기르기 위해 조깅을 하고 있다. 아들이 군대에서 조금 더 단단하고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걱정이 앞선다.     

지난 3월,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 사건으로 46명의 장병이 희생되었다. 아직 사건의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고, 구조는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다. 국방부의 늦장 대응과 석연치 않은 과정은 희생자들의 부모와 형제들을 분노케 했다. 한 네티즌이 쓴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라는 글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될 때,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가슴이 미어졌다.    

 

772함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의 어둠 도서해의 그 어떤 급류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

작전 지역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가스터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

디젤 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대 임무는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귀대하라.

남기훈 상사, 신선준 중사, 심영빈 하사, 이상희 병장, 안동엽 상병, 김선호 일병...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의 초계는 이제 전우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이다.    

 

한편,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나섰던 한주호 준위의 순직은 온 국민을 슬프게 했다. 이번뿐만 아니라 규명되지 않은 군 사병 사고가 잦아 자식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부모들의 걱정이 크다. 하루빨리 46명의 희생 원인이 규명되어 다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1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해발 912.8미터의 황학산이었다. 작은 표석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앞으로 진행할 코스를 가늠해 보았다. 오늘 산행을 오후 3시경에 마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능선으로 이루어진 코스를 생각해 보니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의 배낭은 저마다 불룩했다. 지난 3월,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3시간 28분의 기록으로 완주한 유진한 산악 대장이 힘들어하는 여성에게 "알곡만 짊어져서 힘든 것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여성은 옷 때문에 배낭이 부풀었다고 설명했지만, 여전히 많이 힘들어했다. 산 벗들은 그녀에게 마일리지를 더 쌓아야 한다며 격려했다.     

산행을 준비할 때 어떻게 배낭을 꾸릴지 고민하게 된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조금 더 가볍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배낭의 무게와 내용물은 계절에 따라 달라지지만, 스틱, 도시락, 생수, 무릎 보호대, 방석, 장갑, 수건과 손수건, 휴지, 물티슈, 선글라스, 초콜릿 같은 행동식은 기본으로 챙긴다. 여름에는 생수 서너 병과 손수건, 우의를 추가하고, 겨울에는 생수나 손수건 대신 아이젠, 스패츠, 따뜻한 차, 털모자와 장갑을 챙긴다.    이런 물품들은 배낭에 마구 넣지 않고, 가벼운 옷가지를 밑에 깔아두고 시간에 따라 꺼내기 쉽게 꾸린다. 그래서 산에 오르기 전에 무거운 물건이나 사용하지 않을 물품은 버스에 남겨두게 된다. 4월이지만 오늘도 아이젠을 챙길지 고민하는 이들이 있었다.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독일의 루프트한자라는 항공사 이야기가 생각났다. 박완서의 에세이 『여행 가방』을 읽다가 웃음이 나왔다. 공항에서는 여행객이 잃어버린 가방을 일정 기간 보관하다가 찾지 않으면 경매로 처분하는데, 가방 속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낮은 가격에 낙찰받아 열어보면 때로는 괜찮은 물건을 얻기도 하지만, 대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옷가지 등이 나와 구경하는 이들에게 흥미와 웃음을 주곤 한다고 한다.     

박완서 작가도 여행 중 가방을 분실한 적이 있었고, 자기 가방이 낯선 사람들 앞에서 공개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했다. 우리 삶도 이처럼 큰 여행 가방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곡차곡 정리하며 반듯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지난 3월, 안산시청의 최재영 경제정책과장이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열정적인 공무원이었던 그의 죽음은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사무실에서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시집을 발견했다. 마라톤을 완주하고 자전거와 배드민턴을 즐겼던 그에게서 시집이 나와 주위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고인은 각박한 세상에서 감성을 유지하려 했던 것 같다. 지인들은 나에게 운동을 지나치게 하지 말라는 조언을 건넸다. 경계해야 탈이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백화산은 해발 1,064미터로, 완만한 능선과 많은 바위가 자리한 봉황의 산이다. 발 아래에는 봉생(鳳笙), 왼쪽에는 봉황이 울었다는 봉명산, 앞쪽에는 천년고찰 봉암사(鳳岩寺), 뒤쪽에는 시루봉(해발 914.5미터)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에는 주흘산과 조령산이, 남쪽에는 희양산과 속리산의 능선이 빛나고 있었다.     

오늘 여정의 반 정도를 걸었을 때, 일행이 힘들어했다. 양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새로운 것이나 마음의 부담을 받을 때, 다음 날 힘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남진 능선 길을 되돌아보니 많이 걸었다. 평전치와 사다리재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보고 올라선 곳은 이만봉이었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였는데도 정오가 되지 않았다. 평소보다 느긋한 일행들도 있었다.     

지난 3월 입적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 삶은 큰 울림을 주었다. 얼마 전, 직장 후배가 전화로 『무소유』 책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무소유』 책이 100만 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법정 스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고 했던 뜻을 생각하면 탐탁지 않다. 책의 이름이 무소유 아닌가. 소유욕 때문이다. 스님은 현실에 관한 비판 글도 많이 남겼다. 역대 대통령과 현 정부에 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굳이 스님을 좌우로 가른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우리 사회는 특정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에만 집중하고 다른 문제는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천안함 사건 후 국민들의 관심이 백령도로 옮겨졌고, 좌우 갈등도 잠시 잊혔다. 한국 사회는 쏠림현상이 심하고, 쉬 끓는 냄비와 같다. 언제부터인가 좌파는 곧 빨갱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오래전 퇴직한 선배 공무원들은 나에게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빨갱이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좌익 빨갱이인가?     

시루봉 안내판을 보지 않고서는 내려가는 길을 알 수 없었다. 먼저 걸어간 발자국을 뒤쫓고 백두대간 리본을 찾아 길을 잡으니, 지난달에 왔던 배너미평전이 보였다. 이곳부터 은티마을까지 2.9킬로미터는 지난달보다 많은 잎이 떨어져 있었고, 벼락에 맞아 쓰러진 나무 옆으로 큰 나무가 또 쓰러져 있었다. 벼락 맞은 나무는 불에 그슬린 자국이 선명했다.     

은티마을 계곡에는 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다. 유래에 따르면, 은티마을은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 여궁혈(女宮穴)이라서 음기가 세서 과부가 많이 살았는데, 남근석을 세운 후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전해진다. 은티마을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400년 된 당산나무 소나무 옆에 전나무가 서 있었고, 그 앞에 돌을 쌓은 탑이 새끼줄로 동여매져 있었다.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과 안녕,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며 세운 남근석이었다.     

이번 산행은 그동안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산을 오르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우릿재에서 은티마을까지의 길은 단순히 산을 오르는 여정이 아니라, 내면의 성장과 성찰을 위한 길이었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앞으로도 산을 오르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내 삶의 여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16차, 이화령 - 황학산 - 배너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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