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고 하더니, 지리산에서 출발해 어느새 덕유산까지 올라왔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예보했지만, 덕유산은 햇빛이 반짝였다. 오늘의 산행은 전북 장수군 육십령에서 시작해 할미봉, 서봉, 남덕유산, 무룡산, 동엽령을 거쳐 횡경재까지 24.6킬로미터 구간이다. 송계사로 연결되는 3.2킬로미터 접속 구간까지 포함하면 총 27.8킬로미터가 된다. 시간당 2.5킬로미터로 계산하면 11시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며, 비가 오면 더욱 힘들 것이다. 후미 그룹은 긴장했지만, 선두 그룹은 빠르게 산으로 들어섰다.
육십령에서 시작하는 산길은 첫걸음부터 가팔랐다. 소나무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숨이 찼지만 상쾌한 기분이었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산 벗들과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속도에 맞춰 함께 걷는다. 할미봉의 길은 바위들로 막혀 있었다. 2008년 5월 새벽 3시에 이곳을 찾았었을 때, 별을 볼 틈 없이 오르내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은 밝은 낮에 여유롭게 산세를 감상했다.
할미봉 정상에서는 서봉과 남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변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을 아우르는 산으로, 해발 1,614미터의 향적봉이 주봉이다.
서봉으로 이어지는 길도 가팔랐다. 바위 위에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니 철쭉이 바위틈을 뚫고 봉우리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해발 1,492미터의 서봉에서 내려다본 할미봉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육십령에서 시작한 산길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으며 앞날을 고민한다. 나 역시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쓴 <걸음걸이>라는 시를 읊조려 본다.
걸음걸이
한쪽이 닳은 신발 뒤 굽을 보며
걸음걸이가 왜 편치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절뚝거렸던 시간
헛디뎌 넘어졌던 지난 발걸음이
온전히 신발에 기록되어 있었다
굽을 덧대어 버티어야 할까
걸음걸이를 다시 배워야 할까
생각 끝에
햇볕 맑은 날
남은 生의 걸음을 위해
내 걸음걸이를 바꾸기로 했다
남덕유산과 월성재로 가는 길목에서 대부분의 벗은 월성재로 발걸음을 향했지만, 나는 몇몇과 대간 길이 아닌 남덕유산으로 향했다. 해발 1,507미터의 정상은 한산했다. 정상 아래에서 한 가족이 식사를 준비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삶이 소박하고 소중해 보였다. 인생은 크지 않아도 충분한데, 우리는 왜 많은 것을 찾으려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배꼽시계가 울렸다. 남덕유산에서 내려온 곳은 월성재였다. 먼저 도착한 산 벗들이 햇볕이 드는 곳에서 성찬을 펼쳐놓고 빨리 오라고 외쳤다. 파김치와 낙지볶음, 그리고 인기 많은 고추장이 나왔다. 산에서 뜯은 곰취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모습이 야생답게 보였다. 후식으로는 개떡이 나왔고, 한쪽에서는 커피도 준비되었다. 산속에서 개떡을 먹는 것은 정말 재미있다. 오늘 처음으로 다리를 쉬어 앉은 시간이라 더 그렇다.
삿갓골재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무룡산으로 향할 때쯤 한두 방울 비가 흩날렸다. 가끔 구름이 휘저었다가 햇빛이 반짝거렸다.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용기를 갖는다면, 낮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일 것”이라고. 무룡산으로 오르는 곳은 바람이 세차서 나무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억새나 삭정이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산에서는 계단이 싫다. 그런데 옆에 걷던 산 벗이 “어휴,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계단” 하면서 뛰어올랐다. 힘들 때는 웃으며 피로를 푸는 것이 좋다. 누가 시켜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무룡산. “이곳에 최무룡 씨가 사느냐?”라고 묻는 내 말에 산 벗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햇빛 속에서 다시 비가 내렸다. 몇 시간만 참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동엽령으로 가는 길목에 비를 뿌렸다. 우의를 입고 배낭 커버를 씌우고 본격적인 우중 산행을 준비하는 몸짓들이 바쁘다.
우중 산행은 시원함을 느끼게 하지만, 앞으로 4시간 이상을 견뎌야 하기에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고 손전화도 비에 젖지 않도록 배낭 깊숙이 찔러 넣었다. 산죽잎에 앉아 있던 빗방울이 허리춤 아래로 스며들었다. 저 멀리 먹장구름이 산 아래로 내려왔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으로 가는 길과 횡경재로 가는 갈림길은 송계사 삼거리이다. 우리는 횡경재, 송계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비가 오니까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아차 하는 순간 길이 달라지면 낭패를 본다. 기우가 현실이 되었다. 후미에 오던 여성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무전 연락이 왔다. 연락도 되지 않아 선두와 중간, 후미 대장들이 긴장하며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다행히 30여 분 후 그 여성이 향적봉으로 향하다가 다시 진행 방향을 찾아 함께 후미에서 이동 중이라고 한다.
향적봉으로 가는 길은 백두대간이 아니고 횡경재에서 빼재로 가는 방향이 대간 길이다. 송계사 삼거리에서 횡경재까지 3.2킬로미터는 오르내리고 때로는 능선길이라 지루했다. 우리는 다시 3.2킬로미터를 횡경재에서 송계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온몸이 젖은 상태에서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쉬지 않고 걸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가끔 물안개를 하늘로 날리는 산세를 보는 것이 즐겁다. 마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이름 모를 산새 소리와 까옥거리며 울어대는 까마귀. 먹이를 찾아 나선 것인지, 바삐 뛰어가던 산토끼가 이방인들의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귀를 쫑긋하는 모습이 신기해 발길을 멈추고 숨을 고르기도 했다.
송계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랐다. 작은 바위들이 삐죽 머리를 내밀어 등산화 밑창을 탁탁 울려 무릎이 아팠다. 그렇게 1시간 이상을 내려왔는데도 산자락이 보이지 않고 날은 어두워졌다. 무엇보다 걱정은 다음 산행에서 이 길을 올라 횡경재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뎅” 하고 산을 울리는 산사의 종이 묵직하게 울렸다. 계곡에 흐르는 물줄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보였다. 송계사 입구였다. 아직 기운이 남았는지 산 벗들이 달리자고 한다. 마스터스답게 그들은 잘 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 기운이 몰려와도, 일찍 도착한 이들과 함께 음식점에서 마신 막걸리가 시원했다. 오전 8시 50분에 출발해 오후 7시 10분에 산에서 내려왔으니, 몸은 지쳤다. 다음 구간은 송계사에서 횡경재까지, 또다시 지봉, 빼재, 삼봉산, 대덕산, 덕산재를 통해 24.55킬로미터를 걷는 구간이다. (6차, 육십령 -남덕유산 -횡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