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를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났다. 마지막 산행이라는 생각에 잠을 설치긴 했지만, 지난 3년간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버스에 올라 미시령으로 향했다. 오늘의 코스는 미시령에서 진부령까지, 15.6킬로미터의 길이다.
미시령에 도착하자, 통제 구간을 넘기 위해 발소리를 죽이며 통제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철망을 넘었다.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관리 비용을 받고 산행을 허가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오직 통제만 하는 관리청의 방침에 반발하며 금줄을 넘어섰다.
오늘 산행은 기존의 길이 아니어서 시작부터 가파른 경사였다. 전국적으로 비가 예보되어 있어 배낭은 우의와 스패츠로 부풀어 있었지만, 마지막 산행이라는 생각에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첫 번째로 만난 곳은 해발 1,239미터의 상봉이었다. 저 멀리 신선봉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는 신선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40여 개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는 풀잎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리산에서 시작된 여정을 떠올렸다. 풀잎 님은 처음 지리산을 산행할 때는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일행을 쫓아가기에 바빴지만, 3년이 지난 지금은 선두를 따라잡을 만큼 산악인이 되었다. 물론 나의 다리도 그만큼 단련되었다.
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의 『핑』이 떠올랐다. 『핑』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연못을 찾아 떠나는 개구리 이야기로, 삶의 고비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무엇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책이다.
산을 오르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니, 나의 삶은 울퉁불퉁했다. 그 중심에는 공무원노동조합이 있었다. 공무원노동조합은 내 삶의 분기점이자, 전환점이었다. 나는 한 때 소심하고 나약했었지만, 공무원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변화하고 역경을 이겨내는 힘을 얻었다.
안산시 공무원들은 2001년 직장협의회를 준비하였으나, 시의 조직적인 방해로 구성하지 못했다. 1년 후 다시 시도하여 2002년 5월에 직장협의회 설립을 공식화했다. 나는 선거에서 안산시 공무원직장협의회장으로 당선되어 6월 15일 창립대회를 열었다. 직장협의회는 상하 간의 소통이 없던 조직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740여 명이 일시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2002년 9월 1일, 태풍 루사가 휘몰아치던 날, 1박 2일 해병대 극기 훈련을 마치고 직원들의 근무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조직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2002년 11월 4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정부의 일방적인 공무원 조합법 제정에 반대하여 연가 투쟁을 계획했다. 나는 안산시에서 홀로 서울로 올라가 한양대학교 정문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그날 전국 공무원 561명이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후 2003년 6월 10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안산시지부를 창립했다. 공직사회 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을 촉구하는 공무원노동조합을 신선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땅끝마을 해남에서 임진각까지 국토 548킬로미터를 종단하며 "깨끗한 공무원, 깨끗한 공직사회"를 외쳤다. 2004년 5월 12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지부장들은 교보문고 앞에서 시위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내가 연행된 곳은 관악경찰서였는데, 유치장에서 전태일 기념관 건립위원회에서 엮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만났다. 책은 내 삶을 다시 고민하게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한국전쟁, 1960년대는 4·19 혁명을 떠올리게 한다면, 1970년대는 전태일을 떠올리게 한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전과 함께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 하늘로 떠났다. 2009년 4월 15일,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은 그가 단순히 투쟁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삶을 고민하고 아름답게 살고자 했던 인간임을 알려주었다.
이후 2004년 11월 14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공무원노동조합법 제정을 촉구하며 총파업을 벌였고, 3,000여 명이 공직에서 배제당했다. 나는 11월이 되면 전태일 거리를 찾아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공직에 몸담은 지 31년이 되는 지금까지, 나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옳지 않은 것을 지시했던 시장과 갈등을 겪었고, 상사들과 정책을 두고 마찰을 빚었다. 공무원직장협의회와 공무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직위해제와 해임,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벌써 7년이 흘렀다.
정약용 선생께서 아들 학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의 저울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利害), 곧 이로움과 해로움의 저울이다. 이 두 가지 저울에서 네 가지 등급이 생겨나는데, 옳은 것을 지켜 이로움을 얻는 것이 으뜸이고,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 해로움을 입는 것이다. 그다음은 그릇된 것을 따라가 이로움을 얻는 것이며, 가장 낮은 것은 그릇된 것을 따르다 해로움을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이롭지는 않았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로운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상봉에서는 멀리 울산바위와 황철봉으로 오르는 너덜지대가 보였다. 김정녕 회장은 "저곳을 새벽에 네발로 기어 올라갔었는데"라고 말하며 백두대간 종주 산행의 끝자락에 대한 후련함을 드러냈다. 그는 책임감에서 벗어난 듯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1시간 30분 동안 3.45킬로미터를 걸어 해발 1,204미터의 신선봉에 올랐다. 구름바다가 펼쳐진 산하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고는 2.85킬로미터 떨어진 대간령으로 향했다. 구름이 산기슭에서 올라와 산을 덮고 있었다. 통제 구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산기슭에 펼쳐졌던 구름이 산허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그 장엄한 광경에 모두 넋을 빼앗겼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이렇게 여유로운 산행은 처음이었다. 대간령 오르는 길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힘을 내어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봉우리를 넘으면서 지도를 들여다보고 안내 표지판을 보면 거리 표기가 제각각임을 느꼈다. 산뿐만 아니라 국토를 종단할 때도 그랬다. 지도가 부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군 14연대의 전쟁 보고서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조선의 의병을 학살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의병 학살 작전에는 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반면 우리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음에도, 지도 제작을 금지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듯 지도 하나로도 나라의 흥망성쇠를 가늠할 수 있다. 백두대간을 걷는 사람들이 많지만, 거리 표기가 제각각인 이유다. 관리청은 금줄만 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거리 등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마산령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었다. 백두대간을 타고나면 삶이 달라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 역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의 삶과 앞으로의 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발걸음이 느린 내가 포기하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게 해 준 모든 이에게 감사드린다.
12시에 해발 1,052미터의 마산령에 올랐다. 나는 바위에 올라 외쳤다.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백두대간 산신령이시여! 이제 3년간의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마치려고 합니다.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3년 전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백두대간 종주 산행의 시작을 천지 만물에 알렸듯이, 종주를 마치며 만물에 알리니 가슴이 후련했다. 대간 길의 종착지인 진부령으로 향했다. 단풍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가을이 떠나려 한다. 산은 녹음을 내려놓고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옆에는 백두대간 종주 기념비가 줄지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힘겨운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가자, 백두산으로'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이를 ‘이어가자, 백두산으로!’로 고쳐 읽었다. 백두대간은 진부령이 끝이 아니라 한반도 북쪽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임을 느꼈다. 단지 걷는 백두대간이 아니라 한반도를 잇는 하늘길이 되어야 한다.
진부령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을 잇는 한반도 남쪽의 최북단 고개다. 진부령 표석 앞에서 산 벗들은 서로에게 백두대간 종주 산행 종료를 축하했다. 김정녕 회장이 말했다. "문안을 만든 새벽 님이 직접 백두대간 종주 기념패를 회원들에게 읽어 주시죠." 나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종주 기념패를 읽었다.
백두대간 종주 기념패
김정녕 님께서는
어머니 같은 드넓은 지리의 품속에서
아버지처럼 장엄한 설악의 진부령까지
690킬로미터 한반도 등줄기인 하늘길을
새벽을 깨우고 눈보라와 비바람 그리고 강렬한
햇빛을 헤쳐 나가며 오롯이 종주하셨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하였지만,
함께 한 산 벗들의 격려로
종주 산행을 갈무리하면서
이제 또 다른 희망을 준비하려 합니다.
아무쪼록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통해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며 희로애락을 함께한
마음을 이 패에 새겨 오랫동안 간직하고자 합니다.
2011년 11월 5일
안산 백두대간 종주 클럽 산 벗 일동
우리의 이야기를 백두대간 종주 기념패에 담았다. 이 기념패를 책상 앞에 두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보며 다시 이겨내기를 소망한다. 나는 글을 통해 내가 살아온 삶과 '하늘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제 3년간의 백두대간 종주 산행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35차, 미시령 - 신성봉 - 진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