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아남는 법을 버리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혼자가 편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늘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취미를 즐기고, 누군가를 만나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연애 초반의 그는 내가 참았던 슬픔을 위로받고자한 날에도 "그냥 너 혼자 살아."라며 돌아섰다. 그가 3일 차에 이별을 말한 순간에도 "나는 혼자가 편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느꼈다. 이건 편함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걸.
그는 어릴 적 부모와 정서적 유대관계를 잘 맺지 못했다. 부모는 항상 그를 방임했으며,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의존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유아기에도 부모는 의존이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의 감정과 생각은 대개 묵살되었다. 그런 어린 시절을 통해 그는 회피형 애착 유형을 갖게 되었다. 과거 버림받은 경험으로, 자신의 말들이 쉽게 무시되었던 경험으로 인해 생긴 방어기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며, 연결을 갈망한다. 하지만 상처받는 게 두렵기에 홀로 독립이라는 감옥을 입었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나를 지키는 것'은 나를 혼자 세우는 것일까?
사람은 독자적으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인생은 정말 혼자일까?
의존은 결함이 아니라 본능이다. 실제로,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과 의존 관계를 맺는 사람일수록 스트레스 대처 능력과 행복 지수가 높다는 연구들이 있다. 심리학에서 ‘의존 욕구(dependency need)’는 단순히 유아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욕구로 정의된다. 즉, 상대에게 의존을 하는 것은 어린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정신분석가 도이 다케오는 ‘AMAe’라는 개념을 통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도 타인에 대한 ‘감정적 의존과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고 심리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여기서 가장 질 높은 행복과 의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이다. 사랑은 곧 의존이며, 나를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사랑은 결국 나를 잃는 것이다. 자원봉사와 같이 타인을 돕는 경우도 내 기쁨이나 감정적 이익 등을 얻기 위해 시작한다. 모든 것은 나의 이득을 위해 시작된다. 그러나 더 깊이 상대를 사랑하게 되면, 내 이득보다 상대의 행복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시점이 온다. 그 사람이라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그 바다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감정이 든다. 봉사도 마찬가지다. 처음은 나를 위해 시작하지만, 하다 보면 진정 타인의 행복을 더 추구하게 된다. 사랑을 하다 보면, 나의 기쁨은 자연스레 상대의 미소에 달려 있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질 높은 행복은, 내 방어기제를 내려놓을 때 진짜 연결로 완성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내 과거를 극복해야 한다. 방어기제를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존이 가능해진다. 의존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선순위는 바뀌게 된다. 세상에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삶의 이유다. 그리고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면, 상대의 우선순위도 내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처음은 내 방어기제를 내려놓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서서히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주기 시작한다.
자존심, 고집, 고정관념 등 사랑이라는 것에 독이 되는 것을 하나둘씩 버리게 된다. 1순위가 된 사랑으로, 다른 순위들도 물들어가는 것이다. 의존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부 맡기고, 함께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에게 안기는 것이다. 상대가 넘어지면 나도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상처 없는 평화가 아니라, 상처를 함께 끌어안고 걸어가는 의지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상대에게 온전히 주는 것이다. 내가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마음의 열쇠를 기꺼이 건네는 일이다. 물론 누군가에겐 사랑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존재를 이루는 철학이다. 단언컨대 사랑보다 더 가치 있는 순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대의 철학자부터 현대의 철학자까지 동일한 주장을 펼치는 이가 무수히 많다.
“사랑은 유일하게 인간의 존재를 초월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 《사랑의 기술》
"인간 존재는 관계 속에서만 완전해지며, ‘너’와의 진정한 만남(I-Thou)은 삶의 가장 깊은 충만을 경험하게 한다."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 《나와 너》
"인간이 가진 최고의 행복은 깊은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 《니코마코스 윤리학》
누구는 나에게 "너무 낭만적인 소리다.", "현실과는 동떨어져있다.", "요즘 MZ 같은 소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 철학을 믿는다. 나는 앞으로도 내 존재론적 낭만주의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이 외롭지도, 고되지도, 허무하지도 않다. 항상 내 곁을 지켜주는 그가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철학을 공유하는, 내 평생의 동반자인 그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를 통해 나를 잃었고, 그래서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단단함으로, 다시 그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