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4일 일요일이다.내일은 부처님오신날이고 어린이 날이다. 화요일 6일은 또 대체공휴일이다. 토 일 월 화 4일연휴다. 특별한 일은 없지만 채연과 수진을 오랫만에 본다는 것이 가장 설레는 일이다. 손녀들이 고등학생 중학생이라서 점심먹고 외가에 들렀다 저녁에 바로 올라 간단다. 그리고 선호 준호의 어린이날 선물로 킥보드를 사놓고서 그들이 와서 선물을 보고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깜빡 잊었다. 어버이 날이 낼 모레인데 생각지도 못했다.
무슨 선물을 살까
옷을 사드릴까 화사하게
아니야 있는 옷도 많은데
잠옷을 사자 엄마 아버지 커플로.
항상 이맘 때면 무엇을 준비할지 고민하고 지갑의 두께도 생각하고 돈에 비해 좀더 퀄리티가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다가 어느 해 부터는 그래도 현금이 낫다고 해서 현금으로 드렸다.
가끔은 현금과 함께 손편지를 길게 써서 드리면 아버지께서는 책상위에 두고 자주 꺼내 읽으신다. 동생들이 오면 동생들에게도 보여 주신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시고 일기를 쓰시고 성경을 쓰신다. 거의 두어시간 남짓 앉아계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니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넘어져서 고관절이 다치기 전까지는 일상이었다.
책상위에는 엄마와 함께 백양사에서 찍으셨던 사진과 교황님 사진이 놓여 있고 일기장과 성경쓰기 노트가 있다. 책꽂이엔 성경책과 김수환추기경님이 쓰신 책 그리고 경향잡지, 월간다이제스트등이 꽂혀 있다. 아버지 집에 가면 으레히 아버지 일기장을 먼저 펼쳐본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 있다. 흐트러짐이 없이 아흔살이 넘도록 규칙적인 생활로 자신을 관리하셨다.
일요일(4일) 미사 시작 전에 신부님께서 어버이날 을 기념하여 어르신들에게 식사대접을 하신다고, 7학년 이상은 꼭 식사하고 가시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작년까지와는 다른 오늘임을 알아차렸다.
아버지께서 작년 봄에 주님곁으로 가셨으니 부모님은 아무도 안계심을 새롭게 알아차렸다. 있는 돈으로 선물해 드릴 상대가, 부모님이 아니 계심을 느끼게 되었다. 이럴 수 가 있는가 어버이날이 다가오는데 부모님이 안계셔서 서운하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자식들 손자들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뚜르르르 흘러내렸다. 마음속에서 구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모두 서서 입당성가를 부르는데 목이 메어 부를 수가 없었다. 내놓고 울 수도 없고 손을 움직이자니 옆사람에게 신경쓰이게 할 것 같아. 그냥 흘러내리게 놔두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진정되었는데 성가대에서 어버이날 특송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부른다. 다시 또 마음에 구테타가 더크게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길으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까 그릇될까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위에 주름이 가득 땅위에 그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가지 아낌없이 인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우리 형제들은 케잌에 불을 밝히고서 이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었는데. 왜그렇게 슬펐던지 8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그림처럼 앞뒤 없이 펼쳐진다. 젖이 아파 피가 나도 젖을 빨려야 했던 엄마, 다리가 아프시면서도 일수 돈을 받으러 가게마다 들르시며 도장을 찍고 다니셨던 엄마, 그토록 바쁘시면서도 손재주가 좋아 가정 수예 숙제로 나온 수놓기를 해결해 주셨던 엄마, 다른 집은 과일 한바구니 사면 우리 집은 두바구니는 사야 했다던 엄마,
아들을 기다리며 낳고 또 낳고해서 딸이 일곱이라서 더 힘들었던 엄마를 생각하느라 눈물이 그렇게 났었다. 엄마의 모습과 항상 우리를 잘살도록 부추기셨던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버지는 항상 "잘해라!." 하셨다. 그 말씀이 많은 부담을 주었었는데 그 말도 그립다.
볼 수없는 부모님이 보고싶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 겨울이었다 목포에서 서울 수도여자고등학교를 진학하겠다는 딸을 말리지 못하고 시험보는 날 엄마가 교문까지 따라오셨다. 많이 추운 날이었는데 학교앞 빵집에서 기다리셨다가 끝나고 나오는 나를 반겨주셨다.
고등학교합격소식을 들으시고는
"미희야 고맙다 아들 낳은 것 보다 더 좋구나"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그때는 남동생이 하나 생긴 뒤였다. 엄마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가사를 돌보아야 했던 설움에 항상 배움에 한이 맺혀 있으셨고 여자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일제시대를 지내시면서 '이찌니 산시 고로구시찌하찌구주' 일본말은 곧잘하셨다. 엄마가 셈할때는 일본말로 하셨기에 그냥 내입에서 절로 나온다. 글씨가 맞는 줄은 모르겠다.
중학교시험을 치르던 날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데 목포여중 담장위에서 나를 큰소리로 부르셨던 아버지. 어떻게 아버지가 그 높은 곳에 올라가셨는지 지금 상상해도 이해가 안되는데 아마 나를 빨리 찾기 위해서 올라가셨으리라 짐작한다.시험치느라 고생했다고 아버지가 우동을 사주셨다. 그날 생전 처음으로 중국집에 가서 우동을 먹었었다. 그 중국집 벽에 붙은 메뉴중에 '울면'이 있는 걸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먹다가 운다는 건가? 궁금했으나 먹어보진 않았다. 아버지의 아주 젊을 적 모습이 기억났다.
성가대에서 3절까지 노래를 부르는 동안 훌쩍이며 머릿 속에서 넘겨지는 엄마의 모습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절절했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잘해드라는 말이 있음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시부모님도 친정부모님도 모두 가시고 안계신 지금 이제는 잘 모실 부모님도 안계시고 전화할 곳도 없다. 신부님은 7학년도 훌쩍 지났으니 대접 받을 나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아직 대접해야 할 나이라고 우기니 남편은 "이제 꿈에서 깨시지요" 한다.
아들 며느리도 무슨 선물드릴까 고민할텐데
선물이 뭐 그리 중요하겠니 아무려면 어떠냐 살아 생전에 서로 얼굴보고 함께 밥먹고 웃으며 지내면 다 된거지. 온가족 10명이 함께하면서
내 마음의 구테타는 고요히 진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