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자 Mar 22. 2024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마라

[이방인], 알베르 카뮈

세상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고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기억은 안 난다. 학교에서 의인화라는 문학적 기법을 배운 적이 있다. 산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에 인간의 감정을 대입시켜 표현한다든지, 집이나 전화기 같은 사물을 인간처럼 표현하는 기법으로 기억한다.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기막힌 의인화 기법을 찬탄한다. “어떻게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하고 말이다.


의인화가 소위 먹히는 기법인 이유는 우리가 자연과 사물에 우리를 대입해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세상 자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세상은 기뻐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슬퍼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그렇게 인간 친화적일까?


세상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무심한 당신’이라고 표현할 때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무심하다. 내가 우울한 날에도 하늘은 맑고 태양은 밝게 우리를 비춘다. 내가 행복한 날에도 소나기가 퍼붓고 천둥번개가 친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무심한데, 인간은 세상에 관심이 많은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의미를 찾고 이유를 찾고 존재유무를 천착하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행해진다. 죽음이라는 세상의 이치까지 생각이 미치면 인간은 죽음의 이유를 몰라 억울해한다. 죽음을 모르니 억울하고, 죽음을 모른 체 살아가니 삶이 불안하다. 알베르 카뮈의 시선은 인간의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불안에 주목한다.


부조리한 세상을 인식할때 삶은 비로소 가치 있다.(나도 카뮈 같은 존잘남이었으면 부조리한 세상 따윈 무시했을 텐데.)


‘이방인’은 우리에게 무심한 세상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주인공 ‘뫼르소’의 시선을 따라간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뫼르소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았고, 애인 마리의 청혼에 대해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대꾸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깡패 레몽이 친구 하자고 권하자,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자.‘고 말한다.


친구가 된 레몽과 함께 떠한 여행에서 뫼르소는 레몽에게 원한이 있는 아랍인들과 싸움을 겪게 된다. 그 싸움에서 레몽은 손과 얼굴에 칼로 부상을 당하고, 뫼르소는 애인 마리의 걱정이 귀찮고 답답하여 홀로 바닷가 산책을 나간다. 거기서 뫼르소는 아랍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아랍인의 날카로운 칼날이 비추는 태양 빛을 견디지 못하고 품 안에 있던 레몽의 권총을 아랍인에게 쏜다. 뫼르소는 그렇게 살인자가 되었다.


뫼르소는 자신의 재판에서도 무심한 태도로 임한다. 살인한 것은 맞지만 이게 그렇게 큰일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태풍이 마을을 휩쓸어 여러 사람이 죽어도 태풍은 죄가 없다. 태풍을 향해 분노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뫼르소는 자신의 살인을 태풍 때문에 생긴 우연한 사고처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법은 세상의 이치와 같지 않았다. 뫼르소는 배심원들과 재판장이 봤을 땐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고,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애인과 해수욕장에 놀러 다녔으며, 아랍인이 죽은 뒤에도 권총 네발을 더 난사한 사이코패스 살인자에 불과했다. 뫼르소에게 배심원들과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뫼르소에게는 상고를 할 것인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선택이 남았지만 선택은 쉬웠다. 상고를 해서 극히 낮은 확률의 무죄를 받는 것은 뫼르소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 법, 몇십 년 더 산다는 게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줄거리 내내 뫼르소는 세상 같은 무심함을 유지하다 딱 한번 인간 같은 분노를 토하는 장면이 있는데 꽤 인상적이다. 사형수에게는 의례적으로 신부가 찾아와 죽음과 죄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데, 뫼르소는 신부의 방문을 계속 거절한다. 눈치 없는 신부는 부득불 뫼르소를 찾아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죄와 죽음 이후의 내세의 삶에 대해 뫼르소에게 연설을 해대는데, 이에 뫼르소는 폭발하고 만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 [이방인] 中


예수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느니, 죄를 뉘우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느니, 자기는 불쌍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느니 그런 헛소리 그만하라는 소리다. 뫼르소는 이제 삶의 부조리를 깨달았다. 그에게는 종교적 신념도, 도덕적 관념도 법과 사회의 통제도 필요 없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뫼르소는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부조리를 초월하는 사람이 되었다. 신부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다.


뫼르소는 이후 사형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죽고 싶다고 말한다. 이 ‘이방인'의 마지막 장면은 뫼르소가 자신을 이방인으로 생각하는 세상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다양한 해석을 남긴다. 죽기 직전 뫼르소는 세상 사람들을 부조리도 깨닫지 못한 딱한 자들이라고 비웃었을까? 아니면 부조리에 속박된 사람들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진리에 다다른 자가 가지는 건 우월감일까? 동정심일까? 이런 질문들에 답하지 않고 뫼르소는 그렇게 죽음을 택했다.


심각한 이야기만 늘어놓았으니, 가벼운 이야기를 좀 하며 끝맺고 싶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보며 나는 솔직히 카뮈처럼 생기고, 똑똑하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갑남을녀, 범부에 불과한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 속에서 일반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말이다. 세상을 삐딱하게 볼 권리도 그렇게 삐딱할 수 있게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닌가? 이런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카뮈가 소위 제임스 딘처럼 존잘(잘생긴 사람을 이르는 최신 비속어)이었기에 내가 느끼는 열패감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이치나 부조리를 깨닫는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오늘 평범한 얼굴의 평범한 인생을 살아간다. 카뮈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그처럼 생각하지도 못하지만, 카뮈의 소설을 읽고, 같은 생각에 취하며 이렇게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댈 수 있으니 행복하다. '이방인'에 나오는 레스토랑 주인처럼 매일 방문하는 뫼르소를 바라보며 지긋이 그를 관찰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나는 카뮈가 아니다. 하지만 카뮈를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것으로 되었다. 나는 카뮈도 아니고 뫼르소도 아니다. 나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부조리한 한 사람일 따름이다. 세상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는데, 나는 세상에 관심이 많고 이 관점을 바꿀 생각도 없으니 말이다.



이전 23화 철저한 실패주의자로 사업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