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윌리엄셰익스피어
햄릿을 읽었다. 연극 대본을 처음 읽는 사람이 다 나 같은 감정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프리카 초원에 떨어진 이상한 현대인 같은 기분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린 사람이 느끼는 낯설음이라는 공포와 햄릿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주는 권위가 더해져 나를 무참하게 짓눌렀다. 읽다 읽다 도저히 못 읽겠었어서 유튜브를 틀었다. 내가 본건 1948년작 햄릿이라는 영화였다.
아무리 오래된 고전 영화라도 영화는 영화였다. 1500년대의 연극대본보다는 보기 편했다. 햄릿에 적힌 셰익스피어의 영어 원문을 음미하면, 한 문장 한 문장이 시와 같아서 그 아름다운 표현에 감동을 받는다고 하던데, 나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니 햄릿의 스토리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영화를 감상하고 책을 다시 보니 스토리에 몰입감이 있었다.
햄릿의 스토리는 한마디로 권력을 둘러싼 궁정암투의 비극이라 볼 수 있다. 요즘말로는 정치스릴러 정도 될까?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이다. 그런데 왕인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자신의 삼촌이 왕위에 오르고, 그 삼촌은 자신의 어머니와 재혼을 한다. 햄릿은 우연히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 아버지의 죽음은 암살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범인은 현재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삼촌임을 알게 된다.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 앞에서 복수를 맹세한다.
햄릿은 전 왕이 암살당하는 상황을 묘사한 연극을 삼촌에게 보여주고 그를 당황시킨다. 당황한 삼촌이 기도실에서 자신의 암살을 독백하며 자백하게 되고 햄릿은 이를 엿듣게 된다. 이때 햄릿은 삼촌을 죽일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한다. 기도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관례상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햄릿의 삼촌은 햄릿이 자신에 대한 복수를 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역으로 햄릿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햄릿의 우유부단했던 선택의 결과는 결국 자신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게 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을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대사이자. 현대에도 자주 회자되는 명문이다. 아마 인류 역사에서 연극 대사로 한 문장을 남겨야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이 한 문장이 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훌륭한 문장임에는 틀림이 없다. 인간의 삶과 죽음, 선택과 결과에 대해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표현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나는 햄릿을 보면서 인간의 선택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과연 인간이란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일까? 이 질문은 현재도 논쟁적인 철학 주제인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맥이 닿아있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고뇌하며 복수를 할지 현재에 순응하며 살지를 선택해야 했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삼촌의 기도를 들으며 여기서 삼촌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햄릿에게는 이렇게 두 번의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독자들이 보았을 때 비극을 피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과연 햄릿이 이 두 번의 기회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결론이 달라졌을까? 첫 번째, 복수나 현실순응이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햄릿이 현실순응을 택했다면, 자신도 어머니도 사랑했던 오필리아도 살 수 있던 결론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인가? 두 번째, 기도하는 삼촌을 죽이냐 마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삼촌을 죽였다면, 과연 복수에 성공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정의를 실현했다고 선포할 수 있었을까?
첫 번째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한들, 삼촌이 아버지를 죽인 암살범이라는 사실을 안 햄릿이 고뇌하는 모습을 삼촌에게 들켰을 가능성이 높고, 그럼 간악한 삼촌은 자신의 형을 암살했을 때처럼 햄릿을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두 번째 선택의 기로에서도 햄릿이 삼촌을 기도실에서 죽여버렸다면, 기도하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그 당시의 관습을 어겼다는 점과 더불어 삼촌이 암살범이라는 증언은 자신만 들었을 뿐이니 햄릿이 정의를 실현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햄릿은 스토리상 외통수에 처했던 것과 다름이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 불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햄릿이 우유부단함의 대명사라는 평가는 이런 점에서 지나치다. 어떤 선택을 하던지 자신에게는 지옥인데, 그 누가 우유부단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밧줄을 단숨에 잘라 문제를 호쾌하게 해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알렉산더 대왕정도가 생각난다. 이와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햄릿과 같이 반응할 것이다.
햄릿은 결국 복수를 택했고, 기도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 삼촌을 죽이는 복수에는 성공하나, 그 과정에서 애꿎은 어머니가 죽었고, 사랑하는 연인 오필리아가 죽었고, 오필리아의 아비와 오빠도 죽었다. 그리고 결국 햄릿 자신도 죽었다. 햄릿의 선택은 모두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불렀다. 마지막에서 햄릿이 죽어가며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벗인 호레이쇼에게 이 죽음의 교훈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라는 마지막 전언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들이 모두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일일이 걱정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무 생각이 과하면 걱정만 늘어날 뿐이니 말이다. 그러나 선택이란 엄연히 나의 책임인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그 책임의 대가가 자신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햄릿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삶의 모든 선택이 죽음이라는 책임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임을 자각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한 번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요체 그 자체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Life is C between B and D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