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의 구간, 마의 홀드
우리 암장의 문제는 각각의 회원의 수준에 맞혀 문제가 나온다. 내가 잘하는 동작이 많이 포함된 문제가 나오면 좋겠지만 우리 암장은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다. 내가 제일 취약한 동작, 내가 제일 못하는 동작을 연습할 수 있는 문제가 주로 나온다.
내 문제를 기준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예전부터 인동작과 끌어올려 치는 동작은 누구보다 잘했다. 그래서 내 문제에는 이런 동작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 센터장님...) 대신 나는 아웃 자세, 몸을 꼬는 동작, 어깨를 감는 동작(못 하는 건 왜 이리 많지?)을 잘 못하는데, 그래서 내 문제에 70% 이상이 이런 동작들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몇 달을 이 동작들이 주를 이루는 문제만 주구장장 푸는데 거기다 거의 매일 운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이 동작을 못하다니.. 나도 참 대단한 몸치구나..
항상 내가 못하는 동작을 위주로 운동을 하다 보니 체력의 한계는 금방 찾아온다. 몇 달 전부터 내가 운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스마트 워치를 차고 운동을 하는데 최대 심박수가 200 bpm 이 넘는다. 이게 나에게 얼마나 놀라운 수치인가 하면 운동을 하지 않을 때 내 평균 심박은 80 bpm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혈압이 남들에 비해 조금 낮다)
높아진 심박수를 낮추기 위해 매 동작마다 심호흡을 하고, 정말 힘들 땐 홀드에 매달려서 쉬기도 한다.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호흡을 조절하면 온 만큼 혹은 온 만큼의 3분의 2 정도는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홀드에 매달려 쉬어도 심호흡을 해도 2~3 홀드를 잡으면 다시 체력의 한계치에 다다르게 된다. 왜 나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전혀 늘지 않고 퇴보하는 것인가? 미스터리할 뿐이다.
퇴보를 해도 운동을 안 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 오늘도 말하지만 나는 클라이밍에 미친 사람이다.) 나는 떨어져도 꾸역꾸역 다시 매달린다. 매일 똑같은 문제를 풀게 되면 신기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똑같은 구간에서 항상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간을 마의 구간 혹은 이 죽일 놈의 홀드라고 부른다.
이번 달 나에게 배당된 문제는 총 62개의 홀드로 구성되어 있다. 난생처음으로 60개가 넘는 홀드의 문제를 받게 된 나는 제일 처음 문제를 풀었을 당시를 회상해 보면 62개를 잡기 위해 100번이 넘게 떨어졌고(어떻게 62개인데 100번이 떨어지냐고? 같은 구간에서 계속 떨어지면 이렇게 된다.ㅋㅋㅋ) 이 문제의 끝 홀드를 잡기 위해 총 30분이 넘는 시간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문제도 어느덧 3주 차,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방법을 알기에 이제는 2~3번 정도만 떨어지고 문제를 푸는 시간도 10분 정도로 짧아졌다.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의 레벨이 되면 조금만 더 노력을 하면 1~2주 안에 완등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갔지만 여전히 2~3번을 떨어지고 있다. 아 왜 내 실력은 도대체 늘지 못하는 거니!!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실력이 1도 늘지 않은 건 아니다. 왕초보 시절 나는 거의 벽의 각도가 없는 곳에서 문제를 풀었고, 지금은 15도 이상의 각도가 있는 곳에서 문제를 푼다. 그렇기에 실력이 더디게 늘어서 항상 실력이 퇴보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 정도 되니 항상 떨어지는 마의 구간에서 나는 떨어지게 된다. 20번 홀드, 34번 홀드, 59번 홀드 이 3곳에서 말이다. 이 구간이 얼마나 나에게 스트레스이냐 하면 나는 지금 암장이 아닌 커피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번호들이 머릿속에서 바로 나왔다.
이 중에서도 나의 최악의 홀드는 34번 홀드다. 20번 홀드와 59번 홀드는 진짜 죽을힘을 짜내고 어떻게 노오오오력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34번 홀드는 그런 생각조차 안 들기 때문이다.
31번 홀드를 잡는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34번을 잡아야 해!라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템포가 빨라지고 자세가 흐트러지며 호흡이 가빠진다. 바른 자세와 올바른 호흡을 가지고도 어려운 동작을 비정상적인 몸을 가지고 하려니 당연히 안 될 수밖에..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신기하게 벽에 매달려서 31번 홀드만 잡으면 머리가 하얘져서 이 상황이 반복된다. 아.. 나의 비루한 몸뚱아리여.. 나의 멍청한 머리여..
나의 31번 홀드 극복을 위해 뒤에서 S가 소리쳐보기도..(다른 홀드는 S의 말을 들으면 안 떨어지고 잘 잡는다.) 예전에 많이 했던 마인드 컨트롤도 해 보았다. 이뿐 아니라 31번 홀드를 때려보기도, (그래봤자 내 손만 아프다.) 홀드를 쓰담쓰담해 보기도, 기도를 해봐도 여전히 31번 홀드를 한 번에 잡아 보지 못했다.
아 이 죽일 놈의 홀드여.. 내가 너한테 뭐 그리 큰 잘못을 한 거니? 한 번만 나에게 정복되어 주지 않겠니? 네가 나에게 정복당하면 내가 정말 앞으로 너를 평생 무한대로 사랑해 줄게!
여전히 31번 홀드는 나에게 한 번의 정복당하고 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클라이밍에 미친 자 이자 도전 정신만은 지구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은 끈기에 소유자 아니던가! (이건 물론 클라이밍에 한해서만 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문제가 바뀌기 전 완등을 하진 못하더라도 반드시 31번 홀드를 한 번에 잡아 낼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요즘 가장 큰 목표이자 도전 과제이다.
그러니까 센터장님 문제 일주일만 더 유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다음 주에는 꼭 31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렇다. 우리 암장은 한 달 주기로 문제가 바뀌는데 벌써 이 문제를 씨름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다음 주에 문제가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나는 문제가 바뀌기 전 31번을 정복할 것 인가? 아님 그냥 보내줄 것인가? 과연 그 결과는???
* 슬프게도 결국 31번 홀드는 정복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