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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J Jan 16. 2024

EP.26 볼더링 파티

-goodbye 2023년!

 몇 년간 조용했던 그곳이 2023년 마지막 주 목요일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좁았던 공간은 어느새 북새통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 뒤로 환호성 소리가 나기도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으나 어느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일인 듯 말이다. 어둠이 깔린 저녁, 그들의 하루는 이제 막 시작한 듯 보였다.     

 갑자기 왠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그날의 암장 모습을 모르는 제삼자가 보면 이렇게 느끼지 않을까 해서 한 번 해봤습니다.     


 2023년 마지막 주 화요일, 평소와 다름없이 운동을 가니 센터장님께서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내일 홀드에 붙은 문제들 다 제거하라고 말이다. 우렁차게 네라고 대답을 했으나 내 머릿속엔 의문이 가득했다. 새로운 문제는 아마 1월에나 나올 것 같은데 왜 벌써 문제를 제거하라는 거지?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센터장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목요일 날 볼더링 파티 할 거야. 너 꼴찌 하면 암장 퇴출이다.”     


. 볼. 더. 링. 파. 티.     


 소문으로만 무성히 들었던 전설 속에서만 듣던 볼더링 파티 드디어 그걸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인가? 볼더링 파티란 우리 암장만의 송년회이다. 센터장님께서 내신 여러 가지 볼더링 문제를 정해진 시간 안에 가장 적은 횟수로 가장 많이 푸는 가를 겨루는 경기이다. 우리 암장만의 전통이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근 몇 년간은 하지 않았던 송년회가 올해 다시 부활한 것이다. 내가 그걸 경험할 수 있다니!!      


  드디어 암장의 찐 회원이 된 것 같은 행복도 잠시... 잠깐... 근데.. 뭔가 하나 더 들은 거 같은데.. 꼴찌 하면 퇴출이라고? 아니 도대체 나보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이 암장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그럼 나 퇴출인 거야? 잠깐 느꼈던 행복은 큰 불안감으로 변해 나를 덮쳤다. 나 내년에도 계속 클라이밍 여기서 할 수 있는 거겠지?     


 다음 날, 센터장님의 요청이 있으셨기에 나는 몸을 풀고 문제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딱지때기를 하니 (개인사정으로 한 달 이상 운동을 쉬었다.) 내 두 팔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볼더링 파티에 임해도 꼴찌인데 이 상태로는 뒤구르기를 하고 봐도 꼴찌다. 아. 하늘이시여. 왜 항상 저한테만 이렇게 가혹하십니까?     


그렇게 최악의 컨디션을 갖고 마주친 목요일.      


 컨디션이 안 좋으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내가 꼴찌를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니 꼴찌탈출은 내년으로 미루고 딱 한 문제만 완등하자. 나는 나만의 목표를 정하고 암장으로 들어갔다.      


 암장은 오랜만에 북적거렸다. 평소에 시간이 달라 잘 만나지 못한 다른 회원들도 많이 보였고 이사 등의 이유로 이제는 암장을 다니지 않지만 이전 회원들도 센터장님의 초대에 볼더링 파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 암장도 이렇게 북적일 수 있다니.. 사람들 때문인지 벽면을 가득 채운 색다른 볼더링 문제 때문인지 암장은 평소와 같지만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겨냈다. 뭔가 조금 더 상기된 그런 느낌적인 느낌?!      


 그런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쪽 벽면을 채운 체크리스트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체크리스트에는 암장 회원들의 이름과 볼더링 넘버 그리고 시도 횟수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내 시선을 잡아 끄는 그 문구!! 완등 시 에만 표시할 것!! 이 문구를 보니 내 의지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목표는 저곳에 내 필체를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시작한 볼더링 파티.     


 파티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벽에 붙어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파티 시작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파티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나 내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 저 문제 찾아다니며 요리보고 저리보고 보고 또 봐도 내가 풀 수 있을 것 같은 문제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즐기라고 시간을 줘도 즐기지 못하는 나란 여자. 아 클린이는 오늘도 웁니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다 드디어 만만해(?) 보이는 문제를 발견했다. 나는 다른 회원들에 비해 파워 근력은 부족하지만 그나마 유연성만은 비벼볼 만 한데 내 눈에 유연성 문제가 들어온 것이다. 지체 없이 나는 그 문제에 붙었고 단 한 번에 성ㄱ...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문제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중간에서 떨어졌기에 이 문제 해 볼만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두 번째 시도, 세 번째 시도 나의 쉬지 않고 계속 문제를 시도했다. 계속 시도하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선생님의 조언. 거기서 몸을 돌려봐 그럼 풀 수 있을걸? 계속 같은 곳에서 떨어지는 날 보고 선생님은 말씀하셨고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심기일전 도전하기로 했다. 시간은 한 시간 반 내 목표는 고작 한 문제.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천천히 자세를 만들어가며 문제를 풀자. 나는 마음을 다잡고 문제를 다시 풀기 시작했다.     


 네 번째 시도, 나는 최대한 신중하게 발을 하나하나 움직였고 막혔던 부분에서도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자 내 눈에 보이는 top 홀드. 나는 신중히 발을 다시 옮겨서 top 홀드를 잡았다.      

꺅! 드디어 풀었어요!!      


 나는 암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체크리스트 쪽으로 뛰어갔다. 드디어 나도 이곳에 글씨를 쓸 수 있다니..! 이미 다른 회원들은 여러 문제를 풀어 체크리스트는 깨끗하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다른 글씨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얼른 내 이름을 찾아 적기 시작했다. 시도 횟수 4회, 완등 성공!! 그때의 뿌듯함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는 나란 여자.      


 생각보다 목표 달성을 일찍 이뤄냈기에 나는 다른 회원들의 문제 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다 들어온 또 하나의 문제. 왠지 저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첫 번째 문제는 누군가의 무브를 보지 않고 나 혼자 오롯이 풀어냈다고 한다면(물론 선생님의 힌트는 받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무브를 보고 카피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찾아낸 두 번째 문제 역시 4번의 시도 끝에 완등할 수 있었다.      


뭐야? 나 잘하면 꼴찌 안 할 수도?! 30분 만에 2문제를 풀자 자신감이 뿜뿜 차올랐다. 그 자신감으로 남들이 쉽다고 말하던 몇 개의 문제를 더 도전하였으나 도전 결과는 실패! 또 실패! 그렇죠. 저는 힘도 기술도 근력도 부족한 초짜인 것을 또 그사이 망각해 버렸네요. 뿜뿜 차오르던 자신감을 다시 접어두고 나는 다시 문제를 찾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상급자 난이도의 유연성(밸런스) 문제. 오? 저거 한 번 도전해봐? 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그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건 시도 혹은 시작조차 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시작할 수 있는 이 문제를 선택한 것이다.) 첫 시도 실패, 두 번째 실패, 실패는 계속 됐지만 계속 같은 구간에서 실패한 게 아니라 계속 홀드를 하나씩 더 잡아가고 있었다. 이러다 보면 완등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나는 그 문제를 계속 풀게 되었다.     


네 맞습니다. 그렇게 저는 개미지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다른 문제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이 문제만 주야장천 풀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풀었냐고요? 설마요. 저는 왕초보인걸요. 한 시간 동안 30번 넘는 도전 횟수만 채울 뿐이었습니다. (또 쓸데없는 TMI를 풀자면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풀려고 시도하고 있고 여전히 못 풀고 있다.)     


그렇게 볼더링 파티 끝! 나는 결국 꼴등을 했다. 후회하냐고? 전혀. 내 예상의 200%를 달성했는 걸?! 체크리스트에 내 필적을 남겼는걸? 그거면 됐다. 이런 나를 보고 센터장님은 혀를 쯧쯧 차며 내년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센터장님에게 대답했다.     


“내년에는 점찍고 새로운 신입회원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예전이라면 센터장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면 대답도 못하고 쭈뼛쭈뼛거렸을 텐데 이제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내뱉는 거 보면 나도 이곳이 참으로 편해지고 친숙해졌나 보다.      


 나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오래오래 운동하고 싶다. 친해진 센터장님도, 낡았지만 포근한 이 암장도, 무심하지만 열심히 챙겨주는 다른 암장식구들도 모두 함께 말이다. 다들 2023년 고생 많으셨고요, 2024년도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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