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고 신입이 들어오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암장의 최대 장점은 회원이 없다는 것이다. 회원도 많이 없는데 다들 오는 시간도 제각각이다 보니 한 벽을 오래 차지할 수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시간제한 없이 풀고 싶은 문제를 마음껏 풀 수 있다는 말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한 문제를 30분 이상 풀기도 하는데 이건 다른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로지 우리 암장에서만 가능하단 말씀!! (클창에게는 최고의 환경이다 ㅋㅋㅋ)
이것 말고도 회원이 없으니 서로 친밀감과 유대감이 높다. 거의 매일을 보다 보니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안 나오면 그 이유를 궁금해하고 오랜만에 나온 회원들은 여지없이 반겨준다. 또한 서로의 운동을 봐주며 가르쳐주고 응원해 주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나는 이 암장을 사랑한다.
하지만 최고의 장점은 곧 최고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 내가 암장에 다닌 지 벌써 어언 2년이 넘어가지만 내 밑으로 단 한 명의 회원도 없다는 점이다. 물론 그 사이 몇 명의 회원이 오긴 했지만 다들 2달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사이 들어온 회원도 고작 2명뿐) 그렇기에 나는 나이는 아니지만 암장에서 막내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도 누굴 가르쳐 보고 싶다고!! 나도 나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고!! 언제나 외쳐보지만 이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입 회원이 들어왔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진정한 신입 회원은 아니다. 일명 중고 신입. 20대 초반이었던 그는 암장에 오랜 기간 꾸준히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남자. 나라의 부름에 군대에 가야 했고 재대하고 나서는 취업 준비를 하느라 운동에 신경도 쓰지 못하다가 20대 중반이 되고 삶의 안정을 찾아가자 이제 여유가 생겨 다시 암장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동네 사람들 드디어 내 밑으로 회원이 들어왔어요!! 드디어 저도 운동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가 들어왔을 때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앞으로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도 모른 체 말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운동을 쉬면 심각하게 운동 실력이 퇴화된다. 지난 11월 수술로 인해 한 달간 의사 선생님께서 과격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 원치 않게 운동을 가지 못한 적이 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기에 마냥 쉬면 안 될 것 같아 집에서 가벼운 운동을 한 달간 꾸준히 했지만 다시 클라이밍을 나갔을 때 내 운동 실력은 형편없었다. 고작 한 달만 쉬었는데도 말이다.
중고 신입은 운동을 쉬기 전 우리 암장의 에이스였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맞게 힘과 탄력이 좋았고 습득력 역시 빨랐다고 한다. 나는 거의 1년이 넘어 실제 암벽에 나갔지만 그는 3개월 만에 나갔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는가? 하지만 그가 쉰 시간은 3년이 넘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실력이 한없이 퇴화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날 따라잡는 건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내가 그랬으니까.. 그게 맞는 거니까 말이다. (안 그래요? 여러분??)
한동안 나는 중고 신입이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는 퇴근 후 운동을 왔기에 그가 운동하러 온 시간이면 나는 집에 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종종 다른 회원들을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예전 실력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운동을 잘한다는 이야기, 힘과 탄력이 여전하다는 이야기 등등 그를 칭찬하는 이야기가 자주 내 귀에 들려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달간 빠지긴 했어도 그래도 나는 꽤 꾸준히 운동을 다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그가 나를 따라잡을 시간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일이 있어 평소보다 늦은 시간 운동을 가게 된 나는 난생처음 중고 신입의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좌절하고야 말았다.
잊고 있었다.
나는 곧 40대이고 그는 20대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남자이고 나는 여자라는 것을 말이다.
잊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클라이밍을 해 키가 2cm 커서 166cm가 되었다 한들 남자인 그에 비해 한없이 작다는 것을 말이다.
그의 습득력은 기대 이상이었고, 그의 힘과 탄력은 딱 20대의 표본으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정도였을 뿐 아니라 그의 키는 멀리 있는 홀드를 가뿐하게 잡기 충분했다. 아 신이여, 왜 저를 이렇게 비루하게 태어나게 하셨나이까? 왜 저에게는 운동 실력을 주지 않으신 겁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는 아직 그 문제를 완등하지 못했지만 나는 완등했다는 점. 하지만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조만간 그가 나를 따라잡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다시 암장의 최하위 실력자로 떨어질 것임을..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역시나 그는 나를 넘어섰다.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그가 가뿐히 풀 때 그것을 지켜보던 나의 기분이란.. 진짜 이거 안 당해 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좌절감이 느껴지는 것은 기본이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운동 클라이밍이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싫어졌기 때문이다. 아 나 운동 안 해!!!!
그렇다고 내가 운동을 하고 있지 않냐고요? 아니요. 전혀요. 저는 제 마음에 라이벌을 그 중고 신입으로 두고 더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2시간씩 하던 운동 시간을 2시간 30분으로 늘린 것은 기본이요, 클라이밍을 더 잘하기 위해 어깨 운동도 하고 있답니다. 물론 그는 조만간 저를 제치고 저 멀리 나아가겠지요.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겠지요. 그래도 전혀 슬퍼하지 않고 박수를 치며 그를 응원해 주고 나만의 운동을 꾸준히 해나가렵니다. 결국 꾸준히 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랬잖아요. 그죠? 여러분? 흑흑.. (그래도 떨어지는 눈물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