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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을 아는 사슴 Jul 26. 2023

자력구제기

10. 31분의 1

향수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외한이다. 언젠가부터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향을, 향수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기분이 든다. What's in my bag 콘텐츠를 보면 이 향은 어떤 베이스에 어떤 탑 노트(?)에 어쩌고 저쩌고 하는 온갖 모양의 향수들이 나온다. 어떤 향을 지나치게 사랑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체취가 되기도 하는 걸까. 내가 느끼는 좋은 향을 바로 떠올려보자면 잘 씻은 미나리, 타는 모닥불이 떠오를 뿐이다.

코의 감각에 대해서도 여전히 문외한이다. 향기를 잘 반응하지 못하는 만큼, 악취에도 크게 고개 돌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온갖 체액이 넘실대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각에 대해 내가 가장 잘 반응하던 시기는 배스킨라빈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약 2년간의 기간이다. 어릴 때부터 아주 공들인 고급 아이스크림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곳, 언제나 그 통을 한가운데 두고 있으면 온 가족이 도란도란 행복을 퍼먹는 것 같이 느껴지던 곳. 그래서인지 경기도와 광주광역시의 지점을 옮겨가며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퍼 담았다. 알겠지만 배라에서 아이스크림을 담으려면 온몸을 다 던지다시피 아이스박스 속에 담가야 하는데 그러면 아이스크림과 나만이 이 세상에 남는 10초 남짓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 10초의 시간 동안 그 아르바이트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먹고 싶다? 아니다. 춥다? 아니다. 토핑이 이렇게 생겼구나? 아니다.

나는 가까이서 보니까 이 아이스크림은 이 냄새가 나네.. 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아이스크림은 녹으면 아이스도 아니고 크림도 아니게 되니까, 어느 한계점을 넘어버리면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존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의 냄새에 집중하지 않는다. 차갑다는 촉감과 혀에 닿는 미각에 대해 집중한다. 하지만 퍼담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어서도 안 되고 이미 차가움에 익숙해진 아르바이트생만이 그 냄새를 안다. 아이스크림과 아르바이트생의 10초간의 조우 속에서.

매일 31가지의 냄새와 얼굴을 마주 보는 사람으로서 그때는 사람들이 다 아이스크림으로 여겨졌다. 나의 '뉴치케'는 언제나 사람을 평안하게 만들어 줄 줄 아는 애였다. 삶이 날 두고 막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날에 뉴치케한테 안기면 그냥저냥 삶이 어떻게 흘러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뉴치케한테는 나의 별로인 모습을 가장 내보이기도 했는데, 그 쫀쫀한 치즈 속에 나를 잘 숨겨줄 것 같아서 창피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또 다른 나의 '아몬드 봉봉'은 삶의 정석 같은 애였다. 해야 하는 것도 다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하는 애. 해야 하는 건 안 하고 하고 싶은 것도 겨우 하는 나와 완전히 반대되는 애. 그러면서 삶의 재미를 모르지 않는 애였다. 삶을 꼭꼭 씹어 먹는 사람이었다. (모를까 봐 말해주자면 아몬드 봉봉은 31가지 중 부동의 1위를 지키는 아이스크림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좋아하고 부모님도 좋아하고 내 친구들도 좋아하고 아기들도 쉽게 좋아하고 좋아해 주는 애였다.

이 글이 배스킨라빈스의 바이럴 글은 아니다. 이제 전처럼 이 아이스크림 브랜드를 애정하거나 선호하지 않는다. 가끔 가도 동물성 원료가 들지 않은 소르베 종류만 할짝거리다가 만다. 그저 향에 대해 내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배스킨라빈스라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봤다. 음악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그때의 상황으로 3분 만에 나를 데려다준다는 것이다. 어제도 우연히 길에서 아이유의 라일락이라는 노래가 나왔는데, 이 앨범의 발매일 날 나는 혼자 제주도에 갔었고 그날 이 노래를 들으며 동문시장을 휘저었던 기억이 노래와 함께 바로 재생되었다. 그 외에도 화요비의 '12시 5분'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누군가에게 내 노래에 대해 평가받던 작은 코인노래방 속으로 난 바로 들어가고, 모아나 ost 'how far I'll go'를 들으면 두 번째 수능 시험장을 가는 길에 귀 터져라 이 노래를 틀고 자기 암시를 하던 수험생의 내가 살아난다.

음을 잘 느끼는 귀를 가진 사람과 더불어 향을 잘 느끼는 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기억이 배가 되어 기억될 것이다. 어떤 배우의 인터뷰에서 그는 새로운 여행지를 가면 무조건 향수부터 사고 시작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그 향수만 뿌리며 지낸다고. 그렇게 여행이 끝나도 그 향수로 그 여행의 분위기를 기억한다고 했다. 향에 대해 거의 찬양하듯 글을 쓰고 나니 코가 간질거린다.. 내 코는 이제껏 계절의 향을 맡아내는 것도 일부러 킁킁거리며 겨우 해냈는데, 그럼 전 세계의 조향사들이 낙담할 것 같다. 올해의 또 다른 목표 중 하나는 내가 선호하는 향에 대해서 아이스크림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말해보는 것이 되었다.

+) 모순적이게 향수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도 가지고 있는 내 향수가 한 개 있긴 하다. 향이 좋은 걸 알고 있어서 쓴다기보다는 순전히 향수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해서 쓰고 있는.. 향수의 본질에서 한참 어긋나지만 인간의 본질인 모순에는 한 발 더 가까워진 채.. 사용하고 있다. 어떤 향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우스운 날 감내하고 말해주자면.. 르 라보의 'another 13'이라는 향이다. 언젠가 향수를 뿌리고 온 나에게 내 친구는 물었다. 너 향수에 관심 없지 않아? 맞아 관심 없지 근데 이름이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 어나더잖아! 새로운 나! 또 다른 나! 이걸 뿌리면 난 언제나 또 다른 내가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난 빙글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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