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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을 아는 사슴 Sep 01. 2023

모국어는 차라리

살면서 여러분이 절대 듣지 못했을 단어 하나를 말해주겠다. 지금 이 글에서 만나지 않으면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단어이기도 하다.

트레바리.

당신은 이 단어를 아는가? 들어라도 본 적은 있는가? 설마 나만, 양세바리 다금바리 에브리바리 터치마이바리 같은 이 바리들만 알고 있는 것인가?

트레바리는 명사로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표준 한국어 대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당당한 한국어다. 트레바리를 지칭할 때 나는 그동안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생각해 본다. 비관적이다. 부정적이다. 트집 잡는다.라고 했던 것 같다. 이제는 이 말들을 조금 덜 사용한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며 트집 잡는 사람을 그냥 '트레바리'라는 네 글자로 표현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KBS 한국어능력시험을 준비하면서 '트레바리'와 같은 새로운 말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시험을 준비하게 된 연유로 별 대단한 건 없지만, 누군가 묻는다면 스펙이나 목표가 없는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고 답하고 싶다. 누가 나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학문적으로 느껴지는 분야를 더 알아보고 싶었다. 평소에도 주위에서 '문법 경찰'이라는 말을 들었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무조건 사전에 등재된 뜻을 찾아보는 나에게 이는 딱 맞는 공부인 줄 알았다. 또 수능 국어 1등급이라는 지난 영광과 독서광이라는 자체 타이틀이 나의 믿는 구석이기도 했다. 교재 속에서 만난 한국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보다 깊고, 그보다 넓었다. 스무해를 썼지만 이 언어는 내가 아는 나의 모국어가 아니었다. 공부를 한다고 하면 할수록 난 0개국어가 되었다.


듣기 영역에서는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고, 두 사람의 대화방식이 도대체 어떤 대화방식인지 헷갈렸다. 그 어조가 상대를 교묘하게 속이려고 하는 건지, 부드러운 쪽으로 회유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독서 영역 또한 가관이었다. 소설을 주로 읽었던 것이 여실히 티가 났다. 과학 지문으로 빛의 속도가 어쩌고저쩌고, 광포화도가 어쩌고저쩌고 ... 자연계를 졸업했다는 게 무색할 만큼 나는 까막눈이었다. 그렇다고 문학 영역이 수월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화자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설을 사랑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그래도 저랬을 수도 있잖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말이 되는데?'하는 문학적 상상력만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 화자의 감정을 알고싶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을 겪을 미래의 나를 체험해 보거나 겪었던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입시 때 가지고 있던 보편적 정서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대망의 문법 영역. 수능에서는 문법이 1~2문제만 출제되어서 내가 문법을 잘 아는 줄 알았다. 한국어능력시험에서는 대략 20문제 정도가 출제되는데, 문제를 보면 볼수록 내가 해왔던 말 버릇만이 정답 같다. 나는 이럴 때 이렇게 말했었다는 것이 내 정답 표기의 유일한 이유이다. 20년을 쓴 나에게는 자연스레 모국어의 법이 체득되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다. 믿음이 강력할수록 오답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진짜로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 말을, 내 입으로 사용해왔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오래 말해왔을 부모를 놓고 봐도 그들도 나와 똑같이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과정은 내가 알던 것이, 안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입으로 뱉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끊임없이 깨닫는 과정이었다. 한국어 법에 따라 보자면, 나의 지난 말들은 대충대충 허용해 주는 투로 넘어가 줄 수 없었다. 이것도 법이라,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다. 그때마다 새로 배운 단어들을 입으로 뱉어봤다. 시험에 말하기 영역은 없지만 이런저런 상황극을 해가며 단어를 써봤다. 감정도 담아봤다.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고 늘 글을 읽음. 옆에는 조그맣게 '바로 나!'라고 적어놨다. 계제 (階梯):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된 형편이나 기회.라는 단어를 떠올려야 할 때는 두 손을 모으고 "제발 저에게 한 번만 계제를 주세요"라고 짧게 연기했다.


한국어에 관심이 있는 것에 비해서 실제 나의 언어생활은 엉망이다. 발표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말하는데 쓰는 에너지를 힘들어해서 대부분의 대화에선 웅얼웅얼 거린다. 그 와중에 청력도 안 좋은 편이라 상대방의 말조차 제대로 못 알아듣는다. 몇 번 되물어 묻고도 이해 못 하면 허허하고 잘 넘어간다. 나이를 먹도록 또박또박 말하고 귀 기울여 듣기를 덜하고 맥락 파악하고 분위기만 유지하는 기술만 늘었다.

또 모순적이게 문법은 따지지만, 줄임말엔 관대하다. 나는 거의 모든 말을 줄여 말하는 경지에도 이르렀는데. 그 말들은 지속성이 없다. 그냥 순간적으로 짧게 짧게. 그 핑크 바지 어디 있어?라고 하지 않고 핑바 어딨어.라고 하는 식. 누군가가 맥 스파이시 상하이 버거 런치세트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옆에서 맥상런치 맥상런치 라고 반사적으로 두세 번 정도 되뇌는 식이다.

요즘엔 입으로 나오는 음성만이 말이 아니라서, 손으로 적어내는 글까지 말의 범위를 확대해 본다. 카카오톡 메신저 세계에서 난 그저 언어 파괴범이다. 모든 말 끝에 'ㅇ'을 붙이는 습관이 있기도 하고, 몇몇과는 초성으로만 말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대답으로 아무런 글자도 남기지 않고 안경을 쓰고 똑바로 쳐다보는 이모티콘 하나 만을 뚝 보내기도 한다. 그건 상대방과 나 사이에 잘 알았다는 약속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모르면 모를수록, 낯설면 낯설수록 이마를 빡빡 치면서 이 언어를 만들었다는 세종대왕님을 떠올렸다. 경외심 반, 원망 반을 섞어서 이야기했다.

어떻게 이렇게나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언어를 만드셨어요. 근데 활용이 너무 잘 되네요. 은근 예외도 잘 허용해 주셨네요. 하면서 말이다.이런 나를 두고 세종대왕님이 뭐라고 할지 잠시 생각해 본다. 한국어를 너무너무 사랑하면서 너무너무 파괴하는 백성. 너무너무 파괴하는 쪽이 커서 사랑한다는 말도 약간 우습게 느껴지는 지경인 이 백성에게 말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나조차도 예상했을 것이다. 몇 백 년 동안 그는 나 같은 사람을 숱하게 목격했다. 그리고 인자하게 웃으며 말할 것이다.

언어의 본질은 소통이니라.

내가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틀려보는 언어가 한국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할 것이다. 언어는 사용'되지'않는다면 쉽게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줄임말과 은어가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서도 그는 그저 자음과 모음이 쓰인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워할 듯하다.


자연스레 요즘에 화두 되고 있는 문해력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요즘 애들은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연세가 나이인지 모르고, 존함이 성함인지 모르고 성함이 이름인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요즘 애들로 구분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연세와 존함은 알지만, 그렇다고 유행어에 민감하지도 않다. 연세와 존함 너머에 있는 단어를 다 안다고 자부할 수도 없다. 기성세대가 아는 말을 신세대는 모른다. 당연하게 신세대가 아는 말을 기성세대는 알지 못한다. 그 둘은 닮은 데가 있다. 다른 세대의 말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문해력이라는 말이 사실 굉장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세대는 뚝 떨어져 여기부터라는 지점이 없어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에겐 신세대가 아니고 누구에겐 신세대다. 내가 속해있는 나의 세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 의해서 매번 달라진다.


다시, 다시 처음부터 다시, 이 언어를 만든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단순하게 사람들과 이야기하려고 한국어를 만들었다. 내 말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단순히 음성으로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기록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연결되기 위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그래서 그 순수한 본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를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를 멍청한 사람으로 빠르게 만들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런 식으로 대화가 이어지면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엔 멍청이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가치가 없게 된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무지로 대화가 이어진다면 우리는 끝내 소통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맞고 네가 틀린 것만 찾아내다가 서로 지치게 되고 입을 닫게 된다. 요즘 세상에선 손가락까지 멈추게 된다.


그러니까, 길고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조금 더 단순하게 살아가자고. 막막한 게 있으면 쉽게 선조들에게서 지혜를 구하자고. 언어의 목적은 소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천천히 돌아가자고. 그래서 네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합쳐서 더 먼 세계로 같이 나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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