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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마워숲 Oct 24. 2021

당신에게 달린 멸균팩의 두 번째 쓰임

편리함을 줄이다#3

어렸을 적 나는 엄마 껌딱지 같은 딸이었다. 엄마가 요리를 하면 부엌을 서성거리다 오이 한쪽을 얻어먹기도 하고, 엄마가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달라고 하시면 재료를 꺼내오고, 손에 양념이 잔뜩 묻은 엄마를 대신해 반찬통 뚜껑을 열어준다던가 하는 소소한 도움을 드리곤 하는 나름 기특한 딸내미였다. 그런 만큼 엄마도 언니나 남동생보단 나한테 심부름을 많이 시켰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우유갑 펼치기였다.


엄마가 잘 씻어서 말린 1000ml 우유갑 서너개를 가져와서 거실에 놓고 가시면 그 중 하나를 들어 긴 모서리 중에서 접합 부분을 찾아낸다. 찾아낸 접합 부분을 입구에서부터 살살 찢으면서 벌린다. 한쪽 모서리를 다 가르면 바닥면이 나오는데 이때부터가 좀 더 고난도의 기술을 요구한다. 딱지 모양을 한 바닥 부분은 삼각형 부분이 떨어지도록 살짝 비틀면서 천천히 양쪽으로 펼쳐야 깔끔하게 네모로 펼쳐진 우유갑을 만날 수 있다. 잘하면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깨끗하게 잘 펼쳐지면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바닥 부분에서 실패해서 모양이 네모가 아닌, 삼각형의 이가 나간 사각형으로 펼쳐지면 왠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곤 했다.



지금은 우유를 먹지 않기 때문에 우유갑이 아닌 아이가 먹는 두유나, 주스의 멸균팩을 펼친다.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라서 우유 대신 두유나 주스를 마시는데 대부분 비닐 소재이거나 멸균팩에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멸균팩을 그냥 씻어서 말리기만 한 뒤 종이류와 함께 분리배출했었다. 그런데 멸균팩은 종이로 분리배출하면 재활용이 안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잘 씻어 말린 후 펼쳐서 10장씩 겹쳐 멸균팩 수거를 해주는 근처 한살림 매장에 갖고 간다. 얼마 전에는 다섯 살 아이에게 도와 달라고 하면서 함께 잘 씻어 말린 멸균팩 펼치기를 했다. 모서리 부분을 내가 가위로 잘라서 아이에게 주면 아이가 바닥 부분을 펼치는 식으로 분업을 했다. 우유갑에 비해 200ml 작은 멸균팩은 바닥면이 잘 펼쳐져서 다섯 살 아이가 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초반의 의욕적인 던 모습과 달리 후반에 가서는 약간 그만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어찌 저찌 스무 장 정도를 도와준 아이에게 칭찬스티커 두장을 붙여줬다. 멸균팩을 펼치고 있는 조그마한 아이의 손을 보고 있으니 어릴 적 거실에 앉아 우유갑을 펼치던 그때가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안쪽이 은박으로 된 멸균팩의 비닐 은박 부분은 파이프로, 종이 부분은 종이타월로 재활용된다. 재활용 공정에는 시간당 1500kg이 필요한데 국내 수거량이 부족해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많은 멸균팩들이 제대로 분리수거되지 않고 그냥 일반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조금 귀찮고 품이 들어도 제대로 분리수거가 되면 또 다른 자원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인데 잘 몰라서, 또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소중한 자원들이 한 번의 사용으로 버려지고 있다. 말리는 시간을 제외하면 씻어서 펼치는 행동은 멸균팩 하나에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내가 할애한 1분이 쓰레기가 될 뻔한 멸균팩이 종이타월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내가 멸균팩이라면 지금 당장 쓰레기가 되기보단 종이타월로 한번 더 태어나 새로운 쓰임이 되길 원할 것 같다.



혹시 지금껏 멸균팩을 그냥 일반쓰레기로 버렸다면 이제부터라도 멸균팩 수거에 동참해보자. 집 근처 한살림 매장이나 알맹상점에서 만드는 멸균팩 수거를 해주는 거점 지도에서 당신의 지역 내에 멸균팩 수거해주는 곳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동네 주민센터에서 우유팩이나 멸균팩을 휴지나 종량제 봉투로 교환해주는 곳도 있는데 지역별로 차이가 많은 듯해서 각 지자체에 연락해서 문의해보면 좋을 둣하다. 환경부에서 이런 부분은 전국 주민센터에서 가능하도록 공통적인 가이드라인을 적용해 전국적으로 알리고 시행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보고 있나? 환경부 관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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