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거울이 이렇게 여러 가지 모양이 다 있네. 내 평생 이렇게 예쁜 거울들은 처음 보네.”
고운 감색 앙고라 카디건을 입은 노부인은 벽면에 걸린 거울들을 보면서 연신 ‘아이고 예뻐라’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주름진 손으로 거울 틀을 여기저기 계속 쓰다듬었다. 하얀 푸들강아지 같은 새하얀 곱슬머리가 귀밑까지 내려온 노부인은 어깨가 약간 굽은 것 말고는 단정한 자태였다. 아가도 인상 좋은 노부인이 마음에 들었는지 귀여운 앞 뒷발을 종종종 움직여 노부인의 발 밑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에구머니나, 아이고 귀여워라. 내 평생 이렇게 귀여운 꼬마는 처음이네.”
아가는 노부인이 ‘돼지’가 아닌 ‘꼬마’라고 불러 준 친근함에 더욱 기분이 우쭐해져서 특급 필살기인 발끝을 최대한 세우고 통실한 엉덩이를 좌우로 튕기듯 스텝을 밟는 일명 ‘큐트 스텝’을 선보이며 노부인의 발밑을 떠나지 않았다.
노부인은 이제 아예 쭈그리고 앉아서 아가의 필살기를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노부인의 함박웃음 짓는 모습에 뽀득여사도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졌다.
뽀득여사 보다도 한참은 연배가 있어 보이기는 해도 노부인의 눈빛은 여전히 총총해 보였으며 빗살무늬처럼 여러 가닥 얼굴 전체에 퍼져있는 주름살은 오히려 노부인의 얼굴을 햇살처럼 반사시켜 주었다.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차도 있어요.”
“커피 좋지요. 친절하기도 하지. 가게가 참 아늑하고 좋네요.”
햇살 같은 노부인은 뽀득여사가 권하는 소파에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마치 원래 그 진초록 소파의 주인이 이 노부인이었던 것처럼 참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노부인도 그렇게 늘 이 자리에 앉았었던 것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뽀득여사를 마주하고 있었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늘 봬 왔던 분처럼 친근하시고요. 친정어머니 같기도 하고요.”
“아이고, 나도 이상하게 주인양반이 낯설지 않아요. 인상 좋다는 이야기는 좀 듣고 다니기는 한다우. 감사한 일이지. 이 나이에 추해보이면 누가 옆에 오려고 하겠어요. 내 나이가 벌써 아흔이 다 되어 간다우. 올 해가 딱 여든여덟이라우.”
“그렇게 보이시지는 않는데요. 참 고우세요. 인생이 참 편안하셨나 보네요.”
“구십 평생 어째 편키만 했을까.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살아왔다 싶기는 하지. 내가 벌써 구십을 바라본다는 게 실감이 안 날 때 가 많다우. 어느 날 자려고 누워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다 보면 이게 꿈인가 실제인가 하면서…. 댕기머리로 너풀너풀 뛰어다니던 처녀시절이 바로 어제 같기도 하고. 아휴, 참 인생 길다 싶다가도 한순간이지 싶은 것이….”
“그렇지요. 까마득하다 싶어도 바로 손에, 눈에 잡힐 듯한 게 인생인 거 같아요.”
“오늘이 딱 십 년 됐다우.”
“네? 십 년이요?”
“우리 영감이 떠난 지 딱 십 년 된 날 이라우. 오늘이 기일이거든. 어찌 사나 싶었는데 또 그렇게 십 년이 하루같이 또 지났지 뭐유. 딱 석 달 안에 영감 따라가겠다 싶었거든. 유별나게 아껴줬었지 영감이. 나도 그렇고 우리 영감도 그렇고, 나는 나대로 여기서, 영감은 영감대로 저 위에서 혼자는 못 살겠다 싶어서 금새 데리러 오겠거니 하고는….”
노부인은 목이 잠시 메는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마른 목을 ‘흠흠’ 가다듬었다. 뽀득여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잠시 가만히 있어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영감이 꿈에 나타나서는 ‘와 보니 있을 만하니 내 걱정은 말고, 당신도 견딜 만할 테니 좀 더 있다 보세’라고 하지 뭐유. 꿈에서도 영감이 하는 말이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합디다. ‘당신 없으니 하루도 못 견디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싶기도 하고. 나도 참 주책이죠?”
“아니요. 어떤 마음이신지 알 것 같아요.”
“그리고는 참 묘하게도 하루하루가 견뎌지고, 또 그렇게 세월이 흘러갑디다. 아까 저 자주색 종달새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 저 거울말이우. 저 거울을 만지작거리는데 글쎄, 어휴 아흔이 코앞인 내 얼굴을 한참 보다 보니, 그래도 우리 영감이 지금 보다 젊은 내 얼굴을 보고 떠난 게 다행이지 싶어서 혼자 웃었다우. 우리 영감은 늘상 ‘우째 그리 어여쁘노 우리 할매’라고 빈말이든 참말이든 그리 말했었더랬지요.”
귓가에 영감님이 ‘우째 그리 어여쁘노’라고 속삭이는 듯 머리를 살짝 기울이고 귀 기울이는 노부인의 주름진 얼굴에 발그레한 물이 들었다.
“손님이 아흔이 되셔도 백 살이 되셔도 영감님은 늘 ‘우째 그리 어여쁘노’ 하실 거예요. 지금 제 눈에도 얼마나 어여쁘게 보이시는데요. 영감님은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우째 그리 어여쁘노’ 말씀하시며 위에서 웃고 계시는 것 같은걸요.”
노부인은 촉촉이 젖어오는 눈가를 옷소매로 꾹꾹 두어 번 눌러 찍더니 다시 환한 미소를 보이며 자주색 종달새가 그려져 있는 거울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름진 손으로 여러 번 종달새 조각을 어루만지더니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째 그리 잘 생겼노 우리 영감. 영감은 늙지도 않네.”
노부인은 오늘 기일에는 좀 더 영감님에게 어여쁘게 보이고 싶다며 새로 산 거울을 품에 안고는 가게를 나갔다.
‘할머니, 죽음은 너무 슬퍼요. 사랑하는 이와 영영 헤어지는 건. 어우, 생각도 하기 싫어요.’
“아가야, 그렇지. 우리 모두는 태어났기 때문에 또 죽어야 하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삶과 죽음이라는 강 앞에서 헤어지게 되지. 헤어짐은 슬프지.”
‘할머니 우리도 언젠가는 그 강 앞에서 헤어지게 되나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요. 꾸잉.’
“귀여운 아가야, 그래서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하니?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알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가의 필살기 또 한 번 볼 수 있을까?”
‘흠흠, 하루에 두 번이나 큐트 스텝을 밟아 본 역사가 없는데. 좋아요 기분이다! 자 그럼 기대하시라. 이 아가의 큐트 스텝 대 방출!’
아가는 통실 통실한 엉덩이를 최대한 위로 하고는 네 발 끝에 힘을 집중하더니 힘차게 오른쪽 왼쪽 엉덩이를 실룩실룩 런웨이를 걷는다. 아가는 뽀득여사의 뽀뽀 세례와 더불어 따끈하고 고소한 우유까지 배불리 먹고는 꿈속에서도 큐트 스텝을 밟는지 가끔 발끝을 세우고 ‘파바박’ 움직거리며 꽃무늬 쿠션 위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