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득 여사는 커피마니아이기도 하지만 가을마니아이기도 하다. 뽀득여사는 커피와 가을이 참 많이 닮아 있다고 늘 생각한다. 커피의 향과 커피의 색, 그리고 커피의 맛은 가을의 냄새, 가을의 색조 그리고 가을의 정취와 딱 어울린다. 그래서 지금 이 계절이 뽀득여사는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짙은 코듀로이 카키자켓에 톤다운 된 붉은색 단화를 신은 뽀득여사는 오늘따라 한층 더 우아하고 경쾌해보인다. 과하지 않게 컬이 있는 갈색염색 머리는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서 단정해보인다. 뽀득여사는 빌라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의 아리아곡을 흥얼거리며 꿈꾸는 듯 가을이 한창인 상가골목을 걷고 있었다. 바로 그때,
“브라질에 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뽀득여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가을 아침 햇살을 등지고 키가 큰 노신사가 미소를 띄고 서 있다.
“저도 그 곡을 좋아합니다. 흔하지 않은 곡인데 너무 듣기 좋게 부르시길래 저도 모르게, 하하하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이 곡을 아시는 분 많지 않으신데, 더구나 제가 음치라서 꽤 편곡이 되었을 텐데요.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가 보네요.”
“하하하, 아닙니다. 우연히 몇 곡 안 되는 저의 클래식리스트에 있는 곡 이라서요.”
이 낯선 노신사의 웃음소리는 참 가을의 소리와 닮았다고 뽀득여사는 생각한다. 가을이 이렇다니까. 난데없이 길에서 말을 거는 낯선 남자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니 평소 같으면, 가을이 아니었다면 뽀득여사에게는 낯선 일일 텐데 말이다. 그리고 더욱 솔직하자면 이렇게 보기 드물게 이 가을과 딱 어울리는 매력적인 노신사가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저는 빌라로보스의 브라질풍의 바흐의 전곡에서 딱 이 아리아 부분만 좋아합니다. 전체 곡이 이 아리아풍일 줄 알고 음반을 구입했다가 반전에 당황스러웠었지요.”
뽀득여사는 순간 ‘세상에 저도요!’라고 큰 소리로 외칠 뻔한 것을 엄청난 순발력으로 입술 안에서 잡아챘다. 뽀득여사는 내면에서 감정과 이성이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음에 살짝 진땀이 났다.
“아무튼 아침부터 좋은 곡 들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노신사는 젠틀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성큼성큼 앞서서 걸어갔다. 뽀득여사는 내면의 전투가 감정의 승리로 끝났음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노신사는 사라진 뒤였다.
“아가야, 오늘은 참 멋진 날이야. 그렇지?”
‘네 가을하늘은 맑고 우리 뽀득 여사님의 표정도 유난히 빛나네요. 오늘은 특별히 좋은 날인가요?’
“호호호, 내 얼굴이 그래 보이니? 그래, 오늘은 유난히 맑고 빛나는 날이로구나.”
‘맑고 빛나는 날이라는 말이 참 멋지게 들려요. 매일매일이 맑고 빛나는 날이면 정말 좋겠어요.’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아가야. 흐리고 궂은날이 있어서 오늘같이 맑고 빛나는 날이 더욱 빛나는 날이 되는 거겠지.”
‘꾸이잉, 뽀득 여사님. 이렇게 맑고 빛나는 날에 어울리는 맑은 우유의 맛은 어떨까요?’
“호호호, 당연 최고의 맛이겠지. 그렇잖아도 지금 막 우유를 꺼내주려고 했단다.”
감성적인 우리의 뽀득 여사는 오늘은 대놓고 감성의 늪에 작정하고 빠지고 싶었다. 왜 특별히 그러고 싶은 날이 있잖은가. 균형을 맞추려 애쓰지 않고, 자신의 본성대로 그냥 나를 드러내고 싶은 날. 뽀득 여사에게 오늘이 딱 그런 날인 것이다. 뽀득 여사는 브라질풍의 바흐의 아리아의 절정 부분을 흥얼거리며 우아한 동작으로 아가의 우유를 ‘또르르’ 따라주었다.
가을은 그렇다. 가을의 냄새와 맛, 그리고 정취는 반드시 코가, 혀가, 눈이 따로 챙기는 것이 아니다. 가을은 그렇게 ‘가을’이라는 온전한 감각덩어리로 존재한다. 그래서 뽀득여사는 가을과도 대화한다. 뽀득여사는 오늘따라 크레마가 두툼하게 올라온 커피를 머그잔에 가득 따르며 가을과 말한다. 커피는 가을에 태어난 게 틀림없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커피가 이런 색과 향과 맛을 낼 수 있을까. 뽀득여사는 따뜻한 머그잔 속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는 자신을 상상하며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할머니 주무세요? 아니면 기도하세요? 아니면 으악! 할머니 기절하신 건 아니죠?”
“아이고 깜짝이야. 새미로구나! 잔 것 도 기도한 것 도 기절한 것 도 아니란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을 꼭 감고 제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신 거예요?”
“잠깐 누구랑 얘기 좀 하느라고....”
“에이, 거짓말.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시던걸요.”
“우리 귀여운 새미. 새미야, 얘기를 꼭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할머니는 가끔 엉뚱한 말씀을 하시네요. 우리 엄마가 저한테 ‘너는 왜 그렇게 엉뚱하니?’라고 맨날 그러시는데.... ”
“엉뚱한 거 그렇게 나쁜 거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우리는 통하나 봐. 그렇지 새미야?”
“할머니. 그런데 누구랑 얘기하고 계셨어요?”
“가을이랑.”
“가을이가 누군데요? 가을이가 어디 있어요?”
새미는 맑은 눈망울을 요리 저리 굴려보며 약간 설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통통한 손을 통통한 볼에 꾹 찌르더니 뽀득 여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할머니, 설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그 가을이요?”
“빙고! 맞았어. 새미야. 그 가을 맞단다.”
“역시 할머니는 멋져요. 저도 가을이와 얘기하고 싶어요.”
눈빛을 빛내며 손뼉까지 치는 새미의 순수한 모습에 뽀득여사는 가슴 가득 애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새미가 참 예쁘다. 새미는 가을이와 얘기를 해보려는지 한참을 귀를 기울이며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조금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을이가 저랑은 얘기하기 싫은가 봐요. 아무 말도 안 해요.”
“새미야. 서두를 것 없단다. 나는 네 나이 때는 가을이가 있는지도 몰랐단다.”
“헤헤, 그럼 가을이가 말을 걸 때까지 기다릴게요. 저 기다리는 거 잘하거든요. 물론 치킨배달 기다리는 것은 진짜 힘들지만요.‘
“아 맞다. 오늘 우리 할아버지가 저 치킨 사주신다고 했었는데. 엄마 퇴근 전에 할아버지랑 치킨 집 가기로 했어요. 엄마는 살찐다고 치킨은 꿈도 못 꾸게 하시거든요. 참, 우리 할아버지 한국에 들어오신 거 아시죠?”
“저번에 새미가 얘기했었지. 아주 들어오신 거니?”
“아주 들어오신 거요? ‘아주’가 뭐예요?”
“호호호 귀여운 새미야. 다시 말할게. 한국에 잠깐 들르신 거야? 아니면 완전히 사시려고 들어 오신 거야?”
“아하! 그 말씀이셨구나. 몰라요. 우리 할아버지는 워낙 자유로운 영혼이라서요. 우리 엄마가 맨날 할아버지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셨어요.”
“그래 새미야.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말이 멋지게 들리는구나!”
“그럼요. 우리 할아버지는 진짜 멋져요. 할머니도 우리 할아버지를 보시면 한눈에 반하실 텐데.”
새미는 한참을 종알종알 수다를 떨더니 늘 그렇듯이 ‘어머나, 이제 가 봐야 돼요’라는 말과 함께 총총총 사라졌다. 새미가 가게 문을 드르륵 열고 나갈 때 ‘훅’ 들어오는 가을 냄새와 바람에 뽀득여사는 다시금 가을에 흠뻑 취한 채 어깨숄을 가볍게 두르고는 오디오 볼륨을 조금 더 올렸다.